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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교육 문제로 홀로 부임 '울산총각''포항총각'이 원조格 철도 회원·항공 카드는 필수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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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어린이날 다음날인 지난 6일 아침 김포공항.

1백여명의 넥타이 차림 승객이 포항·울산·여수 등으로 향하는 국내선 첫 비행기를 타러 몰려들었다. 대부분 서류가방 또는 양복 케이스 등을 들고 있었으며 골프채를 든 사람도 더러 눈에 띄었다.

이날 오전 6시에 서울역을 출발하는 부산행 첫 새마을호 열차.

자유이용권 승객 전용칸(5호차)은 월요일 아침이면 40~50대 넥타이 부대들이 새벽에 일어나는 바람에 설친 잠을 자느라 한밤중이다.

이른바 '울총'(울산 총각) '포총'(포항 총각) 등으로 불리는 단신 지방 근무자들의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같은 의미의 '구총'(구미) '여총'(여수) '광총'(광양) '대총'(대산)도 있다. 지방도시가 산업단지로 성장하면서 본격 등장한 이들 총각 아닌 총각들은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분주함 속에서도 나름대로 독특한 삶의 풍속도를 그려가고 있다.

#거주 이전의 자유 없는 세상

'총'들의 직업은 다양하다.

서울 본사에서 지방 공장으로 내려온 대기업 임직원, 중앙행정기관·투자기관의 지방관서장, 은행·증권맨, 대학 교수, 건설 현장에 상주하는 본사 직원 등….

산업화 초기인 1960년대 말부터 등장한 울총·포총이 원조격이다.

포항공대의 한 보직교수는 "혼자 내려온 지 11년된 '포총'이지만 포항 지역에서는 명함도 못 내미는 애송이"라고 했다.

홀로살이의 첫째 이유는 자녀교육 문제다.

"거주 이전의 자유는 헌법에만 존재할 뿐 사실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7년째 대구지하철 2호선 공사에 종사하고 있는 김주수(55)현대건설 현장소장의 얘기다.80년대 말 대구에서 근무하다 서울로 옮겼을 때 중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이 집 근처 학교에 배정받는 데 몇달씩 걸렸다고 한다.

구미 삼성전자의 송문국(44)부장은 자녀들이 중학교 1학년, 초등 3학년이지만 함부로 솔가(率家)해 올 생각을 않는다.

"왕따니 학교폭력이니 하는 얘기를 들을땐 괜히 잘 있는 애들 어렵게 할까 봐서"라고 한다.

대부분 사택이 마련돼 있어 주거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다.

포항제철은 30여명의 단신 부임 간부들을 위해 독신자 아파트를 내주고 있고 구미 삼성전자는 황상동에 아파트 몇채를 전세내 사택으로 쓰고 있다.

#밥짓고 빨래하고

스스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처지의 지방 총각들은 특히 아침식사가 걱정이다.

한 정부투자기관의 부산본부장인 모(53)씨는 옛날의 자취 솜씨를 되살려 아침상을 맛깔스럽게 준비하는 것으로 주위에 소문이 나 있다.

경북도교육청의 정연한 부교육감은 지난해 1월 대구에 오면서부터 건강도 챙길 겸 아침을 생식으로 바꿨다.

별다른 약속이 없는 날의 저녁식사도 모호하다.

때문에 과거에는 총무부서에서 혼자 내려와 있는 기관장과 저녁식사를 함께 할 간부들의 당번표를 만들었다는 얘기도 전해 내려온다.

부산의 한 중앙행정기관장은 "과장들 중에도 지방 총각이 많아 약속 없는 사람들끼리 청사 근처에서 가볍게 식사하며 서울의 집 얘기 등을 나눈다"고 말했다.

그러나 생산·건설 현장에 근무하는 기업체 직원들은 대부분 잘 갖춰진 구내식당에서 세끼 식사를 해결한다.

철도청의 바로타 닷컴(www.barota.com) 회원권과 항공사의 마일리지 카드는 '총'들의 필수품. 주말에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2주 전에 예약해야 하기 때문이다. 포항·울산에서는 항공편을, 구미·대구 등에서는 철도를 많이 이용한다. 지난해 경부선에만 1백여만장이 팔린 새마을호 자유이용권은 지방 총각들에게 인기가 높다.

#새로 그리는 삶

해가 저물 때면 집 생각도 나지만 지방에서의 홀로살이가 중년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주기도 한다.

우선 서울에서의 번잡한 일상과 출퇴근의 고역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박양우 대구·경북중기청장은 서울에 가지 않는 주말이면 영남지역의 사찰 탐방을 떠난다.

"지방에 온 뒤 오페라·뮤지컬 등도 여러 차례 감상했다"는 그는 "지방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도 소득"이라고 말했다.

발령받았을 때는 내키지 않았다가도 막상 와서는 좀 더 있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한 정부투자기관의 대구사무소장은 지방 근무를 연장하기 위해 올해 초 지방대학의 박사과정에 등록하고 이를 서울 본사에 통보하기도 했다. 지난해 말 퇴임한 이병곤(58)전 부산경찰청장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며 부인을 내려오게 해 아예 부산 사람이 됐다. 늘어난 여유시간을 자기 계발에 투자하는 지방 총각도 많다.

정연한 경북도교육청 부교육감은 매일 아침 대구 신천변을 따라 5㎞ 가량 조깅을 한다.

한 '울총'은 "요즘 새로운 마라톤 연습장으로 떠오른 문수경기장에 가면 비지땀을 흘리는 울총들을 자주 만난다"고 했다.

포항공대의 한 교수는 "가급적 저녁 늦게까지 실험실에서 학생들과 지낸다"며 "풀어지기 쉬운 저녁시간에 일부러 자기를 가둬두려는 노력을 기울인다"고 했다.

"마누라 잔소리에서 해방돼 좋다"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서울의 가족들은 늘 걱정된다.e-메일은 떨어진 자녀들과의 대화를 위해 지방 총각들에게 매우 유용하다.

정기환·홍권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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