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조선 협객 백동수 오늘의 무예인이 추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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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협객은 신명을 바쳐 사람의 위난(危難)을 구하려 하고, 무슨 일이든 목숨을 바쳐 일을 하며 의를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기』 '유협열전'에서 협객을 규정한 사마천의 정의는 조선조 무인 백동수(1743~1816)에게 잘 들어맞는다.

정조시대 이덕무·박제가와 더불어 실용적인 무예훈련교범 『무예도보통지』를 만들었던 사람, 문인들 못잖게 시·글씨·그림에 능했다는 인물 말이다.

백동수는 친구를 위해서라면 몸과 천금을 아끼지 않고 정조의 호위대인 장용영에서 충성을 다한 것으로 서술된다. 또 수염이 쫙 펴지는 모양새만 가지고도 무뢰배를 제압했다는 거구의 장수가 그다.

들사람처럼 거침없이 살겠다는 다짐을 뜻한 '야뇌(野?)'란 호를 스스로 짓기도 했다. 이쯤이라면 조선의 협객으로 이름이 전해질 법하지만 그는 일제시대 민족무예의 단절 과정에서 묻혀왔다.

처남·매부 사이였다는 이덕무, 친구인 박제가·박지원 등은 후세에 이름을 남긴 반면 무인 백동수는 문집은 물론 행장 하나 남은 게 없다. 신간 『조선의 협객 백동수』는 그 백동수의 모습을 되살려낸 독특한 저작이다.

저자인 김영호(39) 씨는 『무예도보통지』 윤독회를 열고 책에 실린 장창·쌍수도 등 '24기 무예'의 원형을 찾으며 백동수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자로 이름 한줄 실린 게 전부였던 백동수이지만 저자는 파고들수록 그의 위치가 대단함을 느꼈다고 털어놓는다.

북학파들과의 깊은 교유, 노론과 벽파 등 당파를 불문한 넓은 인맥, 정법(正法)을 고수하는 무예인의 정신. 무엇보다 정조의 명을 받들어 조선 무예를 집대성한 작업은 오늘날 민족 무예 복원의 가장 큰 실마리였다.

그런데 무예인 김씨가 벌인 작업이 대단하다. 18세기 관련 문헌은 모두 훑는다는 각오로 백동수의 자료를 뒤졌다는데 흰소리 같지 않다. 김씨는 "수원 백씨 족보에서 시작해 출생·사망·혼인 관계를 따지고 박지원 등 문인들의 글 속에서 백동수 묘사 부분을 발췌했다"고 밝혔다.

이 작업에 무려 7년여가 걸렸다. 열정을 바치면 뜻이 통하는 것일까. 김씨가 구성한 백동수 평전은 새로운 자료 발굴의 신선함과 과장 없는 서술의 생생함을 두루 갖췄다. 『영조와 정조의 나라』 『금관의 비밀』 등 의미있는 역사서를 낸 출판사 푸른역사의 선택이라는 점도 신뢰를 줬다.

서얼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고도 한동안 관직에 나가지 못해 강원도 산골 기린에서 목장으로 생계를 꾸렸다는 백동수의 청년 시절 방황, 그 시대 출중한 서얼들의 공통된 아픔이 책 곳곳에 드러난다.

결국 정조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적서 차별 폐지, 문무 조화라는 역동성의 시대는 사라지고 말았다.

저자는 백동수의 삶을 통해 잊고 있던 그 시대의 패기를 되찾자고 외치고 있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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