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꽃이 더 황홀한 소리의 本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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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스물네번 바람 불어/만화방창(萬化方暢)봄이 드니/구경 가세 구경 가세/도리화 구경 가세'

동리(桐里)신재효(申在孝·1812~1884)가 최초의 여류 국창(國唱)진채선(1847~?)을 그리워하며 지은 '도리화가(桃李花歌)'의 일부분이다. 도리화는 진채선을 뜻하며 '스물네번 바람 불어'는 채선의 나이 24세를 나타내니 그 사모의 정을 엿볼 수 있다.

동리는 고창현(지금의 고창군)의 경주인(서울에 머물면서 현의 연락사무를 대행한 사람)으로 3천석꾼이었던 부친 신창흡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각 고을의 광대를 불러모아 침식을 제공하면서 판소리에 대한 이론을 세우고 사설(辭說)을 완성했다. 당시 14칸의 줄행랑에는 광대뿐 아니라 기녀와 창부들로 붐볐다고 한다. 검당포(고창군 심원면)태생인 진채선도 이때 동리로부터 음악에 대한 천부적인 소질을 인정받고 당대 판소리의 대가였던 김세종에게 사사하며 여창(唱)으로 성장하게 된다.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1869)에서 신재효의 손에 이끌려 남장을 하고 노래를 부른 진채선은 흥선대원군의 눈에 띄게 된다. 동리가 대원군의 곁에서 소리를 부르던 진채선을 그리워하며 만든 노래가 '도리화가'다. 35년의 벽을 뛰어넘은 스승과 제자의 애틋한 마음을 눈치 챈 대원군은 진채선의 귀향을 허락한다. 고향으로 내려온 진채선은 동리의 곁에서 병 수발을 들다 스승이 타계하자 암자에 묻혀 세상을 마쳤다고 전해온다.

당시 판소리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동리는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으며 진채선을 국창으로 만들었고 김녹주-이화중선-박초월-김소희-안숙선 등으로 이어지는 여류 명창의 계보를 형성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처럼 고창은 '판소리의 메카'로 수많은 명창을 배출했다. 김수영(1800년대 서편제의 대가)·김창록(조선 후기 8명창 중 1인)·진채선·허금파(제2의 여류 명창)·김소희(송만갑 명창에게 사사)·김이수(박동실·임방울에게 사사) 등이 여기에 속한다.

신재효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동리국악당(063-564-6949)은 고창읍성 앞에 있다. 이곳을 찾으면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판소리 가락이 떨어지는 봄꽃에 실려 사람들의 발길을 부여잡는다. 국악당 옆에는 생가와 함께 지난해 문을 연 판소리박물관(063-560-2761)도 있다. 국악당은 판소리 전승의 중심지로 유치원생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매일 판소리국악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한달 강습료는 1만(학생)~1만5천원(일반)이다.

박물관에는 그의 사설집·임금의 교지 등 신재효의 유품은 물론 그동안 한국 판소리를 이끌어 온 명창들의 계보가 소개돼 있어 판소리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독공(獨功)체험장인 발림마당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테스트할 수도 있다.

동리의 4대 종부(宗婦)인 강한희(76·고창군 고창읍 교촌리)할머니는 "6·25 전쟁 때 많은 유품이 소실돼 안타깝다"며 "얼마 남지 않았지만 국내뿐 아니라 세계의 학자들이 할아버지에 대해 연구할 수 있도록 유품을 기증하게 됐다"고 말한다.

고창=글 김세준, 사진 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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