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with] 주부 염수진씨의 쇼핑호스트 도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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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홈쇼핑의 1일 쇼핑호스트로 출전(?)한 주부 염수진(33.인천시 불로동)씨.

생방송 40분 동안 고등어 40마리짜리 1700 세트, 얼추 7만 마리를 팔아치웠다. 담당 김연희 PD도 "기대 이상 팔렸다"며 "초보치곤 잘한 것"이라고 했다. 이런 게 대한민국 아줌마의 힘일까.

정리=권혁주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방송 하루 전. 홈쇼핑에서 고등어를 팔기 위해 노량진 수산시장까지 가봐야 한단다. 함께 방송을 진행할 진짜 쇼핑호스트 권수경(27)씨는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정말 우리가 파는 게 싼지, 장점은 뭔지 현장에 가봐야 안다나.

실제 시장에 가보니 값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내세울 것은? 그래, 생선 다듬기가 좀 귀찮은가. 내장 빼고 뼈까지 발라낸 '손질 고등어'라서 주부들이 편하겠다는 점을 내세워야지. 이 얘길 했더니 권수경씨도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쳐준다. 집에 와서 고등어에 대해 알아보려고 인터넷을 뒤졌다. 영양가 등등을 달달 외웠다. 아 참, 36~40마리 한 세트인데 그 많은 걸 어떻게 쓰나. 맞아, 연말이니 아파트 경비실 아저씨께도 좀 드리고, 애들 퉁퉁 뛰어다니는 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울 아랫집에도 나눠 드리라고 해야지.

드디어 오늘이다.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못 잤다. 얼굴이 부었다. 원래 작은 얼굴은 아닌데 TV에 어찌 비칠지 걱정이다. 분장부터 했다. 이건 분장이 아니라 변장이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결혼식 때 신부 화장하던 것 같다. 끝나고 증명사진 한 장 찍어 둬야겠다. 방송을 앞두고 최종 회의. PD의 한마디에 주눅이 확 들었다. "고등어는 원래 잘 팔리는 상품이에요. 다른 제품이 잘 나가면 '고등어 팔리듯 한다'고 할 정도죠." 그런 고등어 판매를 내가 망치면….

오후 1시. 원래 오후 2시40분에 시작할 예정이었던 방송이 2시로 앞당겨졌단다. 음,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 앗! 생방송인데 진작 연락해 둔 가족과 친구들이 나를 못 보겠네. 시간이 바뀌었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쇼핑호스트 권수경씨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모니터에 내가 비친다. 얼굴이 권수경씨의 딱 두 배였다.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다. 갑자기 심장 박동수가 올라간다. 스태프들의 손짓이 무슨 뜻인지 도통 모르겠다. 하여튼 쇼핑호스트가 던지는 얘기에 아줌마식 수다로 화답했다. 더듬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틈이 났을 때 쇼핑호스트가 "잘한다"고 칭찬을 하고 "다음 순서에선 이런 얘기를 하겠다"고 미리 귀띔도 해 준다.

사기가 올라 자동주문 전화 안내도 했다. "080-900-×××× 한번 눌러 주십시오." 가만, 뭔가 이상하다. 그냥 "080-900-××××입니다"라고 해야 했는데 '눌러주세요'라니. 아니나 다를까 PD가 한마디했다. 그것도 스태프들이 다 듣도록 마이크를 켜고서. "안 그래도 잘 팔리니까 전화 눌러 달라고 사정하지 마세요." 에구구. 정신없이 40분이 지났다. 방송이 끝났다. 내 모습이 시청자들에겐 어떻게 비쳤을까.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그냥 잘했단다.

"그래서, 고등어는 한 세트 주문했어?" "방송하고 기념으로 한 세트 못 받아 오냐?"

공짜 좋아하긴…. 친정 어머님은 "우리 딸 달덩이 같다"고 하셨다. 고슴도치 사랑이 따로 없다. 작정해 뒀던 대로 사진관에서 한 장 찰칵했다. 내 모습이 그렇게 마음에 들 수 없다. 그런데 유치원 다니는 아들이 인터넷으로 방송을 다시 보고는 한소리 한다. "저거 엄마 맞아?"

남편은 그날따라 일찍 들어왔다. 방송하느라 고생했으니 저녁상은 자기가 차리겠단다. 부엌에서 한참 떨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나오란다. 아니, 웬 미역국? 남편이 말했다. "내일이 당신 생일이잖아."

그랬다. 방송 출연도, 남편이 끓여준 미역국도, 생애 최고의 생일 선물이었다. 그때 왜 남편에게 말하지 못했을까. "여보, 사랑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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