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논쟁 이렇게 본다<下> 색깔론 제대로 알고 하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음모론이 다소 잠잠해지자 색깔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노무현 후보를 향해 이인제 후보가 제기한 색깔론은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가 "급진세력이 좌파적 정권을 연장하려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섬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현정권 좌파면 IMF도 좌파

이념논쟁은 한국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인 건설적인 정책대결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크다. 그러나 논쟁이 정책적 내용보다 색깔 덧씌우기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 우려된다.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 과정에서 보수·개혁·진보·급진·좌파라는 말을 제멋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대중 정부를 좌파적 정권으로 표현한 李전총재의 발언이다.

물론 金대통령이 1970년대와 80년대 초 상대적으로 진보적 입장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집권 후의 김대중 정부를 좌파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비상식적인 발언이다. 우선 경제정책에서 김대중 정부는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처방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해 보수정권의 상징인 대처 정부나 레이건 정부가 추진했던 탈규제와 시장경제, 노동의 유연화 등을 추구해 왔다. 그 결과 빈부격차가 통계를 내기 시작한 78년 이후 최악으로 벌어졌다. 이같은 정권을 좌파라고 부르는 것은 IMF가 좌파라는 이야기이자, 현정부의 신자유주의에 반대해온 진보세력의 입장에서는 '좌파에 대한 모독'이다. 또 빈부격차를 가장 벌려 놓은 '반서민적' 정권을'친서민적'인 것처럼 보이게 해 의도와 달리 현 정부를 미화해주는 '친정부적' 발언이다.

다른 문제들도 마찬가지다.생산적 복지 프로그램이 좌파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 역시 대처의 프로그램이다. 국가보안법 개정 주장이 좌파적인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이를 촉구해온 유엔이 좌파라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아마 가장 좌파적 의혹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은 대북정책일지 모른다. 그러나 햇볕정책은 경제교류 등을 통해 북한을 변화시켜 장기적으로는 흡수통일하려는'세련된 흡수통일론'으로서 클린턴 정부의 노선과 일치한다. 따라서 햇볕정책을 좌파라고 하는 것은 클린턴이 좌파라고 우기는 것과 진배없다. 이같은 문제점을 알면서도 李총재가 대선을 색깔론으로 몰고 가기 위해 좌파정권 운운하고 나섰다면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보수와 좌파의 뜻을 제대로 몰라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다면 더더욱 문제다.

보수와 진보는 두 가지 용법으로 쓸 수 있다. 우선 변화에 저항하면 보수, 찬성하면 진보라고 보는 것이다. 이같은 용법에 따르면 햇볕정책을 계승하려는 노무현 후보가 보수, 변화를 바라는 한나라당이 진보라는 뜻으로 문제가 많다. 따라서 올바른 사용법은 이를 이념적인 성향으로 이해하는 것인데 이는 평가자가 어떤 이념적 입장에 서 있느냐에 달린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 경향은 서구의 보수 대 진보의 구도가 보여주듯이 보수는 군사독재세력이 아니라 시장경제에 대한 지지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 세력을 의미하며 진보는 시장경제가 초래하는 불평등에 주목해 이에 비판적인 사회민주주의 등의 입장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국의 현 블레어 정권 등 제3의 길은 중도 내지 중도좌파다. 따라서 많이 사용하는 보수 대 개혁이라는 표현은 틀린 것이다.

보수 대 개혁은 틀린 표현

개혁이라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보수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극우로 왜곡돼온 한국의 비정상적인 보수를 정상적인 보수로 정상화하는 것, 즉 진정한 보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보수는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양金씨이지 군사독재세력이 아니다. 또 진보 내지 좌파는 민주노동당이나 한국사회당이고 김대중 정부는 보수, 잘 봐줘도 중도세력이다.

결론적으로 정치권은 이념논쟁에서 보수·개혁·좌파라는 말을 제대로 알고 써야 한다. 그렇지 않고 김대중 정부가 좌파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얼마나 냉전적이고 수구적인가를 보여주는 방증일 따름이다. 히틀러의 입장에서는 우파 정치인이었던 드골도 좌파로 보일 뿐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