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쟁이 변신 '이미지 파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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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처음 '정글 쥬스'의 대본을 받았을 때 그는 화가 치밀었다고 한다. 영화를 본 사람이면 짐작할 것이다. 대사의 반 이상이 욕설이다. 상상력과 설득력은 빈번하게 충돌한다. 게다가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주요'인물이 아니라 '주변' 인물이다. "나를 어떻게 보고…."

분노로 불면의 밤을 지새운 그가 무슨 맘을 먹고 이렇듯 '망가져서' 스크린에 돌아왔을까. 캐스팅 디렉터가 스치듯 건넨 말에 굳어 있던 마음의 근육이 움직였다. "이젠 좀 즐겨 보세요." 그렇다. 그는 그동안 너무 굳어 있었다. 영화와 TV, 화면과 현실에서 시종일관 모범생 브랜드였다. 관객도 그에게 붙여진 상표 이미지에 굳어 있었다. 나이 서른 일곱. 반듯하기보다 빈 듯한 게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부산시 광복동 영화 촬영장에서 당시 최고의 배우였던 신성일씨의 눈에 들어온 게 이 세계와의 운명적 조우였다. "너 배우 해도 되겠다." 얼마 후 신씨는 스스로 제작, 감독한 뮤지컬 영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1971년)에 그 여섯살 소년을 불렀다.

손창민에게는 봄이 너무 길었다. TV 드라마의 시작이 번안극 '소공자'(1974년)였다는 이력도 시사적이다. 그는 방송가의 귀공자였고 한결같이 주인공이었다.

'정글 쥬스'는 그의 30년 연기 생활에 작은 분수령이다. 3류 인생 '민철'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선 그는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했다.

먼지와 햇빛이 필요했다. 선탠을 80번 정도 해서 단정했던 자신을 태우고 걸음걸이도 바꿨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무리 악역을 해도 대중이 미워할 수 없는 눈빛을 지녔음을 인정한다. "해보려고 마음먹었다는 게 중요한 거죠." 인생의 플롯에서 아직 전개의 단계에 불과하다고 해석하는 듯하다.

평단의 시선에 대해선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다. '영화는 논객의 것이 아니라 관객의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어쨌거나 개봉 후 '정글 쥬스'의 흥행은 쾌속 항진 중이다. 촬영 스태프 중에 자신보다 연장자가 없었다는 말에서 영화 속 청춘의 삐딱한 궤적들이 이해가 된다.

변신은 사람을 들뜨게 할 것 같은데 그는 그저 차분히 웃는다. '고교생 일기'에서 드라마 '국희'에 이르기까지 TV의 시청률 보증수표였지만 영화에서 그의 '성적표'는 그리 모범적이지 않았다. 제대 후 찍은 영화 여섯편이 내리 흥행에 참패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영화도 찍었지만 그에게 추락이 날개를 달아주진 못했다.

'정글 쥬스'는 어찌 보면 그 초조함의 산물이다. 회심의 역작까지는 아니지만 변신의 시도라는 점에서 그는 여행을 앞둔 소년처럼 즐거운 듯하다. "배우로서의 시작은 지금부터죠." 그토록 오랫동안 연기한 자가 던지는 이 말을 믿어볼까. "팬들의 함성이 사라질 때 비로소 배우가 될 거라고 알았거든요."

지금 그의 앞에는 스무편 정도의 시나리오가 그의 또 다른 결심을 기다리는 중이다. '당분간은 실험 기간'(세일 기간이 아님)이라는 그의 고백이 본인뿐 아니라 관객들까지 즐겁게 해주리라는 기대감을 은근히 갖게 만든다.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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