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 감정대결 경계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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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흔히 이웃나라끼리는 별로 사이가 안 좋다는 말을 한다. 인접한 국가일수록 역사적인 사연이나 이해 관계가 얽혀 있어 관계가 복잡하다는 뜻이다. 한국과 일본도 결코 예외일 수는 없다. 따라서 한·일 양국에는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양국 관계가 개선될 것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아직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월드컵에 민족감정이 결부되면 서로에 대한 반감을 자극해 오히려 양국의 국민감정이 복잡해 질 수도 있다는 우려다.

'KEROA'플래카드 사건

1993년 10월 25일, 카타르의 도하에서 치러진 1994년 미국 월드컵 예선전에서 한국과 일본은 숙명의 대결을 벌였다. 그때 일본 응원단이 'KEROA'('KOREA'의 오기)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응원에 사용해 물의를 빚은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한국 국내 여론은 'KEROA'는 일본어로 '게로'(下郞)로 읽고 '하인'이나 '머슴'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에 이 표기는 한국을 폄하하는 표현이라고 격분했다. 10월 30일자 모 일간지에 실린 독자투고는 "최근 일본의 학자가 서울에서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망언을 하고 물의를 빚은 바 있는데 이번에는 축구 응원을 통해 우리를 우롱했다. 일본측의 사죄를 요구해야 한다"라는 투고가 실리기도 했다. 일단 상대방의 국명을 정확히 표기하지 못한 일본 응원단의 책임은 크다. 그러나 실제로 'KEROA'를 일본어로 읽어도 '게로'로 읽을 수 없으며 이 표기는 단순한 착각으로 인한 오기(誤記)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축구의 승패를 의식한 상황에서는 거기에 무슨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지 않을까 하고 의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비슷한 사건은 한국에서도 일어난 적이 있었다. 1997년 11월 1일, 서울에서 치러진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전에서 한국과 일본이 또다시 대결을 벌였다. 이 경기에서 한국 응원단이 '일본은 한국의 밥이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가지고 응원해 물의를 빚게 된 것이다. 이 플래카드는 일본어로 적혀 있었으나 '밥이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메시다'라는 일본어 표기가 '메시타'로 틀리게 적혀 있었다.'메시타'는 일본어로 '손아랫사람, 자기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일본은 우리 밥이다'라는 문구가'일본은 우리보다 한수 아래다'가 되고만 것이다. 일본의 언론인 노무라 스스무(野村進)씨는 이 플래카드의 문구를 보고 일본의 유력 월간지 문예춘추(文藝春秋)에 다음과 같이 기고했다.

"정말로 일본이 한국보다 '한수 아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이러한 발상은 안나올 것이다. 경제는 물론 축구도 '한수 위'인 일본에 대한 초조와 굴절된 감정이 한국의 젊은이에게 계승되고 있다면 앞으로 한·일 관계를 낙관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노무라씨의 견해는 잘못 쓰여진 플래카드를 잘못 해석한 결과다. 그러나 이것도 93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축구의 승패를 의식한 상황에서 거기에 무슨 특별한 의도가 숨어 있지 않을까 의심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경기 승패에 흥분은 금물

이번 월드컵에서는 아마도 양국이 직접 대결하는 경기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16강에 오르지 못한다면 그 패배감이 서로에 대한 반감을 자극해 오히려 양국의 국민감정을 악화시킬 우려가 있으며, 그렇게 되면 월드컵을 공동개최한 의의도 퇴색해 버릴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자국 팀을 응원하되 경기의 승패나 16강 진출에 대한 염원을 안이하게 민족감정에 결부하지말아야 할 것이다. 이번 월드컵에서는 한·일 어느 나라가 보다 성숙한 경기와 응원전을 펼칠 수 있는지, 선의의 경쟁과 대결을 벌이기를 기대해 본다.

◇필자 약력=▶1968년 일본 삿포로(札幌)출생▶90년 일본 덴리(天理)대 조선어과 졸업▶2001년 전남대 국문학 박사▶현 전남대 일문과 조교수 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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