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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인천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8면

"사랑은 무엇과 같을까요? 그것은 가난한 이들과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며 그들의 불쌍함과 애처로움을 바라볼 줄 아는 눈이며 다른 사람의 한숨과 슬픔을 들을 수 있는 귀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그곳은 내가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던 곳과 인접한 동네였다. 어렴풋이 어릴 적 살던 집과 유치원과 골목길의 정경을 떠올려 보기도 하지만 이젠 그 때의 기억은 어디서도 더듬어볼 수가 없다. 인천광역시 전동의 비탈진 주택가 골목길의 어떤 집 문 위에 '아우구스띠노 수도회-열림터' 라고 쓰여진 나무 현판이 눈에 띈다. 그리고 키가 무척 큰 서양 신부님 한 분이 편안한 스웨터 차림으로 현관 앞을 쓸다가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수 도복을 입고 계시진 않았지만 그 분이 바로 뵙기로 약속했던 미카엘 원장 신부님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분은 1985년에 수도회의 한국 진출을 위해 호주에서 온 신부님이다.

상처 입고 외롭고 허기진 영혼들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길이 되어주는 곳, 그들의 말을 애정을 다해 들어주는 귀가 되어주는 곳, 그래서 '열림터'라고 하는 그 집을 나는 '달팽이 집' 이라고도 불러주고 싶었다. 좁은 땅에 가능한 한 많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4층으로 쌓아올린 그 수도원을 둘러보기 위해선 가파르게 굽은 계단을 빙빙 돌아 올라가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다치기 쉬운 영혼들을 보듬는 아늑함이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부님은 수도원의 구석구석을 모두 안내해 주었다. 방금 도배를 마친 아주 작고 깨끗한 수사님의 방과 2층에 가꾸어 놓은 햇살이 내리쬐는 아담한 정원, 그곳에선 앳된 모습의 수련 수사님 두 분이 신발장에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봄기운이 묻어나는 햇살 속에서 눈을 가늘게 뜬 채 잠깐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들이 얼마나 뜨거운 사랑에 사로잡혔으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저토록 행복한 표정으로 이 집에 머무르고 있는 것일까" 하고.

"전 주로 사람들의 얘길 많이 듣는 편이에요. 한국말이 서툴러서 말하기 보다 들어주는 일이 훨씬 쉬워요" 라고 신부님은 농담처럼 겸손하게 말한다.

하지만 모두가 자기 목소리를 높이고 자신을 드러내길 원하는 세태 속에서 마음을 열고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며 편견 없이 참을성 있게 들어준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그러기 위해서는 내 몫의 시간을 쪼개내야 하며 때론 내가 하고 싶은 말과 중요한 일들을 뒤로 미뤄 놓은 채 마음 안에 타인을 위한 여백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렇게 나를 비워낸다는 것이 우리에겐 그토록이나 힘든 것이다.

아우구스티노(354~430) 성인은 그리스도적 문학의 고전인 자서전 『고백록』에 기록한 것처럼, 방탕한 청년기를 보낸 후 그의 어머니 성녀 모니카의 눈물 어린 기도로 33세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드라마틱한 삶을 산 분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 후 40여년 동안 이룩한 업적은 놀라울 만큼 다양하며 지금까지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우구스띠노 수도회는 "우리가 함께 모여있는 목적은 일치하는 가운데 우리의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사랑하며 봉사하기 위함이다"라고 요약되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영성을 따르고 있으며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내향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진리가 인간 내면에 있기 때문이며 "네 마음이 변덕스럽다고 생각되면 너 자신을 넘어서서 이성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다다르라"고 성인은 말씀하시기도 했다.

수도회의 한국 진출은 1985년 인천 교구장 나길모 주교님의 초청으로 영국과 호주 관구의 4명의 수사 신부가 도착하여 이루어졌으며 그 뒤로 필리핀 사제 3명이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하고 있고 한국 수사님 11분이 함께 하고 있다.

미 카엘 신부님이 수도회에 대해 여러 가지 소개를 해주시던 중에 6명의 아이들을 돌보며 부모 역할을 하시는 바르나바 수사님이 자리를 함께 했다. '너랑 나랑'이라는 이름의 청소년 가정 공동체는 IMF 이후 해체되는 가정이 급속도로 늘어가면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2002년 2월에 시작되었다.

어떤 이유로든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야만 했던 아이들, 각자 나름대로의 상처를 안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그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피는 수사님을 보며, 이젠 공기나 물처럼 익숙해져 그 고마움에 대해 별다른 의식을 않는 가족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미카엘 신부님은 잿빛 눈동자에 깊은 생각을 담은 채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천천히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핵심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장들은 너무 바빠요. 어머니들도 바쁘고 아이들은 공부하느라고 너무 힘들고 모두가 늦게 집에 돌아옵니다. 집이 호텔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줘야 합니다. 조용한 시간이 필요하고 함께 나누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 살고 있는지, 무엇이 정말 중요한 건지 그 의미를 잃고 있어요. 어디로 가게 될지도 모르고 있어요."

급 류와도 같은 속도의 흐름에 줄이 끊긴 부표처럼 표류하고 있는 가정들의 실상이 아릿하게 가슴을 저며왔다. 수도원을 떠나기 전 신부님과 함께, 커다란 온돌방의 감실 앞에서 잠시 침묵 중에 기도를 올렸다.

"…… 이제 우리 각자의 가슴이 서로에게 '열림터'가 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조금쯤은 걷고 있는 속도를 늦추고, 이쯤에서 잠시 멈춰 서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눈부터 깊이 들여다보아야겠습니다. 그의 결핍과 아픔이 무엇인지 헤아리게 해 주시고, 서로를 멀어지게 만드는 벽의 정체가 무엇인지, 지금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모든 것을 바로 볼 줄 아는 심안을 열어주십시오……".

내 유년기의 빛 바랜 기억들이 아릿하게 떠오르는 그 골목, 그리고 달팽이 집 같이 아늑한 수도원엔 시간이 다른 곳 보다 한결 느릿한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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