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妄想症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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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천재 수학자 존 내시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뷰티풀 마인드'가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감독상을 받았다. 이 영화의 원작은 뉴욕타임스의 기자 실비아 네이사가 오랜 자료조사와 면담 끝에 완성한 내시 전기다. 스무살에 수학의 천재로 세계를 놀라게 하고 31세부터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세상에서 잊혀졌다가 66세인 1994년 노벨상을 수상하면서 다시 살아나는 한 천재와 그의 아내가 이뤄내는 인간승리의 감동 드라마다.

내시가 21세에 쓴 27쪽 짜리의 얇은 박사논문이 '내시 균형(Nash Equilibrium)'의 핵심이다."그가 생각하는 걸 나도 생각한다고 그가 생각하리라는 걸 나는 생각한다…"는 끝없는 추론의 연쇄를 끊어버리는 개념을 고안해낸 것이다.

모든 행위자가 저마다 경쟁자의 최선의 전략에 최선의 대응을 하기만 하면 된다는 통찰이다.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특정한 전략을 사용해서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을 때 모든 참여자가 이에 만족하고 더 이상의 전략을 변화시킬 의도가 없을 때 이를 '내시 균형'이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불가측성으로 경제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개인의 이익을 최대화하고 손실을 최소화할 논리적 전략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뷰티풀 마인드』·도서출판 승산).

포커놀이·증권투자·선거전략에서 누구나 나만 이기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내시 균형을 생각한다면 그런 게임은 존재하기 어렵다. 남의 희생, 남의 손실을 딛고 나만 승리할 수 있는 결과는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서로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균형이 최상이 아닐까. 우리는 너무나 쉬운 이 게임의 논리를 늘상 잊고 산다.

선거도 게임의 일종이다. 내가 생각하는 걸 상대도 생각한다. 그 생각의 바탕에서 나의 전략을 짜면 상대도 그걸 바탕으로 또 다른 전략을 짜고… 이렇게 돌아가는 게 선거전략일 것이다. 상대가 돈으로 조직을 끌어당기면 나는 여자문제를 내세워 맞불을 놓는 이런 식이 지난날 우리 선거전략이었고 지금도 그런 전략엔 별 변화가 없다. 온갖 게이트 의혹에 아태재단 문제가 제기되면 야당 총재의 호화빌라로 맞불을 놓고 경선에서 몇몇 후보가 사퇴를 하니 당장 음모론을 제기해 관중을 뭐가 뭔지 모를 혼란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폭로와 음모가 제기될지 모를 진흙땅 게임을 언제까지 봐야 할 것인가.

당내경선이든 대선경쟁이든 이런 식 게임은 서로가 망하는 길이다. 어떤 승자도 있을 수 없다. 민주당 경선이 절반의 성공이라고 하지만 그 진행과정을 보면 조금도 '내시 균형'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7명이 벌인 초반 게임부터 음모론 제기-사퇴 장고-경선 계속에 이르는 중반과정까지가 조금도 윈윈 게임이 아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 식으로 서로를 헐뜯고 자신을 치켜세우는 저속한 게임이었다. 최선의 전략, 최선의 대응으로 서로가 만족하는 게임이 아니라 서로가 불만을 터뜨리는 괴상한 게임이다. 여당 한 집안 사람끼리 서로를 축복하고 서로를 치켜세우며 최상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누구도 만족 못하는, 언제 판이 깨질지 모를 아슬아슬한 곡예를 벌이고 있다.

내시 균형이란 말은 쉬워도 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시는 31세 되던 겨울 아침 정신분열증 초기증세를 보인다.

뉴욕타임스를 들고 교수 휴게실에 들어온 내시는 신문 1면 좌상단에 자신만이 해독할 수 있다는 은하계 거주자의 암호문이 실려있다고 외친다. 정신분열증이란 관계 망상증(妄想症)이다. 예컨대 전화번호, 빨간 넥타이, 길을 가는 개 한마리, 뉴욕타임스의 기사 한 문장 등 이 모두가 자기만 알 수 있는 숨은 의미가 있다고 믿는 증세다. 지금 대선주자들도 어찌 보면 이런 관계 망상증에 걸렸는지 모른다. 반DJ표는 모두 내 것, 근대화 추종세력이 나를 민다, 젊은이는 나를 기다린다, 모든 것이 나를 음해하는 세력이라고 믿는 이런 집착과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내시 균형이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진정 3金식 정치를 청산하고 새 정치를 해보겠다는 정치인이라면 이런 관계 망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월드컵을 어떻게 치를 것인지, 수출을 어떻게 배가할 것인지, 서해안개발·중국과의 교역을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지, 보다 실사구시적인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에게 새로운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국가전략의 대안제시 경쟁을 해야 한다. 관계 망상증에서 빨리 벗어나는 그 정치인이 결국은 이 게임의 승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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