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무대가 알아봤다 ‘모차르트와 사는’ 이 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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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소프라노 임선혜(34·사진)씨는 딱 수잔나다.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 재치와 영리함을 빛내는 인물이 수잔나다. 날렵한 동작, 밝고 깨끗한 음색의 임씨에게 꼭 맞는 역할이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을 떠났던 그는 1999년 바로크 음악의 거장 필리프 헤레베헤에게 발탁돼 깜짝 데뷔했고,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윌리엄 크리스티·르네 야콥스 등 세계적 지휘자는 물론, 안무가 피나 바우쉬와 함께 공연하면서 유럽의 프리마돈나로 자리잡았다.

공연 도중 잠깐 귀국한 그를 만났다. “수잔나는 이미 몇 번 해봤겠죠?” 가벼운 질문부터 던졌다. 임씨는 올 4월부터 독일 슈투트가르트 극장에서 수잔나로 출연 중이다. 그가 즉각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이번이 수잔나 데뷔에요.” “유럽 무대 데뷔한 지 10년이 지났는데요. 소프라노가 가장 잘 어울릴 듯한 역할을 이제야 한다고요” “희한하게 그렇게 됐네요. 갈라 무대에서 수잔나의 노래를 해본 적은 있지만, 전막 공연은 처음이에요.”

이쯤 되면 오페라 기획자들의 감식안, 혹은 게으름을 탓할 만도 하다. “사실 수잔나를 맡아달라는 제의는 종종 들어왔어요. 그때마다 공연이 겹쳐서 이제야 하게 됐죠.” 임선혜표 수잔나를 한국에서 볼 수 없는 게 아쉬울 뿐이다. 지난 1월 모차르트 ‘이도메네오’를 끝으로 올해 임씨의 한국 공연은 없는 상황이다.

임선혜씨가 이달 말까지 열리고 있는 ‘피가로의 결혼’ 독일 공연에서 수잔나로 출연한 모습. 그는 “운동 선수가 경기 뛰는 것처럼 노래하고 있다”고 전했다. [슈투트가르트 국립극장 제공]

임씨에게 2010년은 ‘모차르트의 해’다. 그가 올해 일정을 종이에 적기 시작했다. 1월 ‘이도메네오’, 2월 ‘돈 조바니’(부다페스트), 4월 ‘피가로의 결혼’, 9월 ‘코지 판 투테’(유럽 투어), 11월 ‘가짜 정원사’(빈)…. “하하하, 모차르트만 다섯 편이네요.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소프라노들 중에서도 이런 스케줄은 드물겠어요.”

임씨는 지금까지 바로크와 그 이전 시대의 고(古)음악을 주로 불러왔다. 그의 커리어에 전환점이라도 온 걸까. 대답은 명료했다. “헨델·하이든도 제게 잘 맞지만 모차르트처럼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 받는 작품에 계속 출연하는 건 행운이죠.”

임씨처럼 유럽 무대에서 연속으로 주역으로 출연하는 한국인은 드물다. 게다가 모차르트의 주요 오페라를 휩쓸다시피 한 올해는 유럽의 모차르트 전문 가수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한국 클래식 음악의 또 다른 성장이다. “모차르트는 음악 자체가 간단하잖아요. 작곡가가 쓴 그대로만 해주면 기쁨부터 슬픔까지 깊고 넓은 감정을 다 전달할 수가 있어요. 근데 사실 그대로 하는 게 제일 어려운 거지만요.” 애교 덩어리 수잔나에서 적국의 왕자를 사랑하는 공주 일리아(‘이도메네오’)까지, 모차르트 작품에서 맡은 역할의 폭도 넓다.

“아직도 하고 싶은 모차르트가 많아요. ‘차이데’도 못했고….” 지금껏 30여 개의 오페라, 그 중 열 개 정도의 모차르트 오페라에 출연했지만 욕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기에게 잘 맞는 역할만 15~20개 골라 평생 하는 가수도 있죠. 하지만 노래를 오래 하려면, 또 새로운 자극을 받으려면 다양한 배역을 맡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는 또 내년에 세계적 음반사인 아르모니아 문디에서 솔로 앨범 녹음에 들어간다. 세계적인 성악가만 까다롭게 고르는 레이블로 이름난 곳이다.

“앨범을 내고 나면 2012년께 베를린 고음악아카데미와 함께 한국에서 공연할 예정이에요. 외국 오케스트라와 아시아 투어를 하는 게 유럽 데뷔부터 꿔왔던 제 꿈이었죠.” 세계를 향한 욕심쟁이 임씨의 꿈은 그렇게 익어가고 있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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