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박당하는 미국의 新현실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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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 십수년간 미 보수주의 외교 정책의 화두인 신(新)현실주의를 주창해왔던 인물 가운데 딕 체니 부통령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리스트들을 쫓아내고, 이라크의 독재자를 몰아내는 궁리를 하는 동안 그는 한치의 감상도 허용치 않았고 자기 회의에도 빠지지 않았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집권 이후,'반대를 일삼는 국내 비판론자나 억지로 끌려오는 동맹국들에게 더 이상 발목을 잡혀선 안된다'는 게 신현실주의자들의 굳은 철학이 돼왔다. 체니 부통령을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은 특히 냉전 이후의 세계에서 미국은 군사력이 적의 위협에 대처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창해왔다. 그런 체니 부통령과 그의 현실주의자 동료들은 지난 2주간 실패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을 겪어야만 했다. 중동을 방문한 체니 부통령은 아랍 지도자들에게 이라크에 관한 미국의 굳은 의지를 전달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긴박한 현실, 즉 악화되고 있는 유혈분쟁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아랍 지도자들은 체니와의 만남을 오히려 이용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이 지역에서 하나의 전쟁(아프간 전쟁)은 할 수 있겠지만 두개의 전쟁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충고했다.

처음엔 거부감을 드러냈던 체니 부통령도 종국엔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그가 이번 중동순방길에서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만나지 않았고 아라파트에게 과격파를 체포하라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주문을 했지만 종내에는 의미심장한 변화를 드러내고 만 것이다.

미국 관리들은 "다음 주 체니부통령이 아라파트를 만나러 중동으로 되돌아 올지 모른다"고 했다.'공정한 중재자 미국'을 드러내고 혐오했던 체니가,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했던 기존의 입장을 버리고 다시 평화를 위해 외교전선에 등장한다는 것은 유쾌한 아이러니다. 더구나 체니는 아랍의 중재자들이 그에게 짚어준 논리를 인정했던 것 같다. 그것은 "적을 완전히 제거하고 싶다면 적이 자랄 조건을 없애야 한다"는 고언이다.

이것이야말로 미국의 힘에도 한계가 있음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신현실주의자들은 지금껏 '미국이 능력과 의지를 과시하면 다른 나라들은 따를 수밖에 없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지난 2주간 중동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미국의 일방주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명백한 현실이 드러난 것이다. 물론 부시 정부가 이라크와 전쟁을 하는데 장애물인 이·팔 갈등을 완화시켜보려고 뭔가 하려는 것이라는 냉소적 시각도 있다.

그럼에도 이번 사태는 일방주의적인 행태를 보여온 미국에 "전세계의 위협을 제거하고 세계를 보다 안전하게 만들겠다는 그들의 목표가 아무리 숭고해도 고립된 상황에선 추구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불량국가들로부터 오는 강력하고 직접적인 위협도 지역평화와 안정이라는 보다 넓은 맥락에서 고려하는 것이 때로는 훨씬 더 쉬울 수 있다. 그것이 미국의 입장을 비타협적으로 고집하는 것보다 현실적이다. 체니 부통령의 이번 여행은 그 시작을 알리는 것일지 모른다.

정리=강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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