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경영권 방어 지원' 백기사 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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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삼성전자의 SK 주식 매입이 재벌들의 '경영권 방어 지원'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해외 언론과 외국계 증권사들을 중심으로 비판적 시각이 확산되는 가운데 국내 재계와 전문가들의 반박 논리도 활발히 제기되고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13일 삼성전자의 SK 주식 매입 소식을 다루면서 "한국의 강력한 재벌들이 외국인 투자자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시도에 대항하기 위해 뭉치고 있는 것 같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재계는 우호 기업끼리 주식을 사주며 경영권 공동 방어에 나서는 '백기사' 역할은 세계 어느 나라 증시에서나 있는 일인데, 왜 비판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 외국인들의 차가운 시선=백기사 논란 때문인지 외국인 투자자들은 실제 삼성전자와 SK 주식을 연일 내다팔고 있다. 외국인들은 삼성전자의 SK 주식 매집이 알려진 지난 8일 이후 삼성전자 1834억원어치를, SK 1712억원어치를 각각 순매도했다. 주가도 하락하고 있다. 시장에선 삼성전자의 경우 IT 경기에 대한 불안감이 첫째 이유지만 SK 주식 매집도 하나의 이유가 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동원증권 민후식 애널리스트는 "삼성전자의 SK 주식 매입은 사업 연관성이나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기 어려운 부문에 왜 투자하는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외국인들은 이번 일을 삼성전자와 SK 간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 재벌들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FT가 "재벌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통상적이지 않은 방법을 취한다는 우려를 키우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서울의 한 외국계 펀드매니저의 말을 인용해 "한국 분위기가 기업들이 방어적인 전략을 쓰는 것을 용인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고 전한 것도 이런 인식을 반영한다.

한 외국계 증권사 관계자는 "외국인들은 아직도 한국 재벌기업이 다른 재벌의 이익을 지원하기 위해 수천억원을 쓴다는 소식에 큰 실망을 표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삼성전자의 자본력을 감안했을 때 SK 지분취득액이 큰 규모는 아니지만 한국 증시에서 삼성전자가 갖는 상징성으로 봤을 때 이번 일은 앞으로 증시에 상당히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재계의 항변=국내 전문가들은 외국인들이 비판하는 백기사 역할은 미국과 유럽 등에선 일반화돼 있다고 강조한다. 증권연구원 빈기범 연구위원은 "이해관계자들이 경영권 방어를 지원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면서 "다만 한국의 재벌체제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외국인들은 재벌들이 과거의 악습을 되풀이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삼성금융연구소 이상묵 상무는 "어려울 때 경영권 방어를 위해 주식을 상호보유하는 것은 오히려 외국 기업들이 즐겨쓰는 관행"이라면서 "유독 한국에서만 재벌들의 불공정한 행태라고 비판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라고 지적했다.

재계의 상호지원을 비난하는 의견이 주로 투기자본에서 나온다는 시각도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승철 상무는 "외국자본은 마음껏 공격할 수 있는 반면 국내 기업들은 방어수단이 거의 없다"면서 "M&A 시장이 비대칭적인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의 제휴는 최소한의 자구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백기사 논란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나 SK의 기업 펀더멘털은 나빠질 것이 없다"며 "외국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해 주식을 팔면 오히려 국내 투자자들은 좋은 주식을 싸게 사들일 기회를 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렬.윤혜신 기자

◆ 백기사란=어떤 기업이 적대적 M&A에 휘말린 경우 주식 매집 등을 통해 경영권 방어를 도와주는 제3의 기업을 말한다. 해당 기업은 백기사 역할을 한 기업에 각종 정보와 편의를 제공해주며, 향후 경영권을 넘겨줄 수도 있고 각종 사업에서 제휴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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