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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혀 있는 교실'에 자유혼 불어 넣을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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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전전(戰前) 일본 사회 속의 파시즘과의 싸움에 삶을 바친 한 지식인에 관한 정보를 접하고 무릎을 친 적이 있다. 인간정신의 고귀함을 증언하는 그 분은 자유학원의 설립자 하니 고로(羽仁五郞, 1901~83)다. 격월간 『녹색평론』발행인 김종철 교수가 쓴 『간디의 물레』(녹색평론사)에 따르면 귀족 출신의 하니는 1940년대에 무소속 참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치학교·대안학교의 운영자로 기억된다. 만년 저술 『교육의 논리』를 통해 전체주의 교육의 본산으로 지목한 문부성 폐지론을 제기했던 문제의 인물이기도 하다.

자유학원은 파시즘적 질서를 유지·강화하는 거점으로 '병영 학교'를 운용하는 군국주의에 대한 저항이었다. 학교 성격이 그러하니 문부성은 눈에 불을 켰고, 겨우 부기학원 수준으로 허가했다. 그런 사정으로 멀쩡한 졸업장도 없는 그 학교에 양심적 지식인들은 아들 딸을 소신입학시켰다. 숨 막히는 전체주의 일본 사회 속의 숨통인 자유학원에 비상한 자유와 관용의 분위기가 넘쳐난 것도 그 때문이다. 기자가 무릎을 친 것은 그 자유주의자의 교과서 폐지론이다. 전전(戰前) 일본 못지 않은 국가주의 분위기가 여전한 한국 사회가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자유학원의 특징은 교과서가 없다는 사실이다. 하니에 의하면 교과서는 평균 이하의 교사를 위해 필요한 것이고, 창조적 교사에게는 외려 방해물이다. 교육은 철두철미 양심적 교사의 책임으로 이뤄질 수 있을 뿐이다. 국가권력이 교육 내용과 가치관에 개입하려는 것은 노예교육일 뿐이다. 공인된 교과서라는 것은 국가권력에 의한 사상통제다."(2백62쪽). 과연 위대한 자유혼의 공간이 자유학원이다. 하니를 떠올린 것은 『살아 있는 한국사 교과서』의 출현 때문이다. 의미 있는 문제제기 없이 흘러가는 적막강산 속에서 교육사적·출판사적 의미마저 갖는 사건이 바로 그 대안교과서라고 기자는 판단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는 자명하다. 이 땅의 참담한 교육 붕괴란 교육의 다양성·자율성을 망가뜨려온 국가 주도 교육의 폐해라는 건 상식에 속한다. 얼마 전 서울지역 고교에 전학을 원하는 학부모 수백명의 밤샘 소동도 지구촌의 진풍경이었지만, 근본원인은 학교를 동사무소 수준의 행정기관으로 전락시킨 결과다. 학교는 커리큘럼 편성·학생 선발권이 없고, 학생들은 학교를 선택할 수 없으니 세상에 고약스럽다. 가관인 것은 이 땅 학부모들의 행태다. 너나없이 속앓이를 하면서도, 막상 가정에 돌아가서는 구약성경 속의 출애굽에 버금가는 교육 엑소더스에 뛰어든다. 서울을 등지는 교육 이민 행렬이 바로 그것이 아니던가?

『살아 있는 한국사 교과서』는 이런 '교육 25시'에 등장한 구원이다. 난파선으로 판명난, 탈출하기 바쁜 교육현장에서 좀더 싱싱한 교과서를 창출해낸 것은 이 땅 교사들의 책임있는 행위다. 이런 평가를 백번 유보한다 해도 그렇다. 하니의 말대로 국정·검인정이란 이름으로 10대들에게 다양성을 심어주지 못한 정신의 학살행위를 막아주는 장치가 그 교과서다. 또 있다. 과연 책임있는 출판행위의 행동반경이 어디까지인가를 보여주는 의미있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 작업을 신생 출판사가 해냈다는 점에 경의를 표한다.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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