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25명 中서 망명 요청> 2명 몸싸움 틈타 일제히 뛰어들어 : 긴박했던 순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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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탈북자들의 스페인대사관 진입은 치밀한 계획과 일사불란한 행동으로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결행돼 중국 공안당국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우선 진입작전이 조직적이고 신속하게 이뤄졌다. 진입 당시 이들 중 두명이 일단 경비원과 몸싸움을 벌였고, 이 틈을 타 나머지 일행이 무사히 정문을 통과해 구내로 진입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치밀한 언론 플레이도 돋보이는 부분.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AP통신은 진입 초기 몸싸움부터 진입 후 만세를 부르는 장면까지 거의 초단위로 사진을 촬영했다. 사전에 탈북자들로부터 통보를 받고 현장에서 대기하지 않았다면 이런 취재는 불가능하다. 실제 AP통신은 탈북자들의 대사관 진입이 이뤄지기 두시간 전인 오전 9시부터 현장에서 대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탈북자 25명이 진입해 난민 지위 인정과 한국행을 요구하고 있는 베이징(北京) 주재 스페인대사관 주변에는 중국의 시위진압 전문경찰인 우징(武警)과 공안들이 집중 배치돼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다.

공안들은 노란색 출입금지선을 대사관 주변에 치고 중국어와 영어로 "미안합니다"를 외치며 일반인들의 출입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특히 사진촬영 중인 외국기자들의 카메라를 빼앗는 등 취재기자들에게는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한 외신기자는 "외신 사진기자들이 탈북자들의 대사관 진입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촬영한 점 때문에 공안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것 같다"고 풀이했다.

○…이번 스페인대사관 진입 사건의 전개양상이 지난해 6월에 일어난 장길수(18)군 일가족의 베이징 유엔사무소 농성사건과 흡사하다. 두 사건 모두 베이징 주재 외국 및 국제기관을 농성장소로 선택해 난민지위 부여를 요청한 뒤 한국행을 선언했다. 남북한 등거리 외교정책을 취하고 있는 중국 정부가 고민에 빠지고, 북한이 침묵하고 있는 점도 비슷하다.

배후 지원단체가 있다는 점도 동일하다. 길수군의 경우 한국의 '길수가족 구명운동본부'라는 단체가, 이번에는 일본의 '북한난민구호기금'과 유럽의 일부 비정부기구(NGO)가 깊숙이 개입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탈북자들을 지원한 독일인 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은 이번 사건을 철의 장막 붕괴 직전 동유럽인들의 망명 요청이 서방대사관에 쇄도했던 것에 비유하면서 "앞으로 이런 일이 늘어나고 탈북자 수도 매번 증가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주말 워싱턴을 떠나 도쿄(東京)·서울을 거쳐 베이징으로 들어간 폴러첸은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에 기고한 '카터 전 대통령에게 띄우는 메모'를 통해 "악(惡)은 존재한다"며 북한체제를 통렬하게 비판한 인물이다.

그는 1999년 7월부터 2000년 12월까지 북한에서 의료활동을 벌이다 추방됐고, 이를 계기로 북한 인권에 관심을 가져왔다.

○…대사관에 난입한 25명 중 일부가 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탈북자의 활동을 지원해 온 국제인권자원봉사단과 '북한난민구호기금'측은 "탈북자 가운데 일부가 질병에 걸려 있다"고 말했으나 구체적인 병명은 공개하지 않았다.

○…주중 한국대사관은 탈북자들의 스페인대사관 진입 소식을 접한 직후 즉시 회의를 소집한 뒤 정무공사 등 8명으로 구성된 '특별대책반'을 편성했다.

대사관 관계자는 "스페인대사관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곧바로 스페인대사관으로 찾아가 설명을 들었다"고 밝히고 "이 자리에서 스페인측에 인도적 처리를 당부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스페인측이 이들을 난민으로 확인하고 이들이 한국행을 원한다는 확인통보를 우리에게 정식으로 전달하기 전까지 이 문제의 당사자는 스페인과 중국 정부가 된다"고 설명했다.

○…'피랍·탈북자 인권과 구명을 위한 시민연대' 대표인 이서(李犀)목사는 14일 스페인대사관에 진입한 탈북자들의 후원단체와 관련, "상황이 진행 중이어서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다"면서 "탈북자와 후원단체들은 사전에 한국대사관 관계자에게 스페인대사관 진입 사실을 연락하지 않았으나 베이징 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측과는 접촉을 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본부장 金尙哲)는 14일 발표한 성명서를 통해 탈북자들의 스페인대사관 진입을 '중국 정부의 난민지위 인정거부 때문에 부득이 선택한 긴급피난'으로 규정하고 "자유의사대로 한국행이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진세근 기자, 베이징=유광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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