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시론

노동당 주도 정책결정 복귀 주목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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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최고인민회의가 4월 9일 개최 이후 불과 두 달 만에 급히 다시 열린 것은 김정일 방중(訪中)의 실패와 북·중 관계 악화, 천안함 사태로 인한 국제고립 심화, 화폐개혁 후유증이 심화되는 상황에 대한 대응조치로 해석해야 한다. 회의의 주된 의제는 경제를 책임진 내각 총리를 비롯한 부총리 및 경제 부처 수장의 경질이었다. 지난해 11월 말에 행한 화폐개혁 이후 흉흉한 민심이 북한 정국을 강타하고 있는데 대한 대응 인사다. 이미 지난 3월에 화폐개혁의 책임자였던 박남기 노동당 재정부장과 김태영 부부장을 고위 간부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 처형했다. 성난 민심을 누르기에는 이것도 부족하자 내각 총리 등을 대거 소환(경질)했다.

주목할 점은 화폐개혁이 야기한 심각한 경제혼란과 민심이반에 위기감을 느낀 평양 권부에서 김정일식 정책결정구조에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서 최영림 내각 총리 임명을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제의’에 따라서 했다고 발표한 사실을 중시해야 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김정일 서기실에서 주요 정책을 결정해 하달하면 당(黨)·정(政)·군(軍)의 각 기관이 집행하는 정책결정 및 집행 방식에서는 모든 책임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돌아올 수 있다. 과거에는 당의 정치국이 결정하고 비서국이 집행하는 방식이었다. 연말에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열어 결산하면 총비서가 잘잘못을 평가하고 책임을 당에 물을 수 있기 때문에 김정일도 과오에서 자유로웠다. 그러나 93년 12월 이후로 이 구도는 정지되었다. 정책결정의 핵심 기구인 정치국이 가동되지 않았고 당 사업을 총화하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한번도 열리지 않았다.

북한에서 정책결정구조가 당 중심으로 회귀하려는 조짐은 최근 들어 당의 영도 강화를 강조해온 데서도 읽을 수 있다. 북한 노동당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결정의 기준은 ‘혁명전통’의 계승이다. 그 목표는 북한식 말로 ‘자립적 민족경제건설’이다. 현재 방식으로는 2012년까지 그러한 목표달성이 어려워 보이기 때문에 권부에서 ‘혁명전통’ 계승을 위한 평가와 조치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정책결정구조 변화가 사실이라면 당 정치국과 민주주의 중앙집중제 복원의 이름으로 김정일 절대 권력에 대한 제동이 걸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분간은 북한에서 김정일 권한에 대한 제한은 승계체제 구축을 통한 방식보다는 혁명전통 복원이라는 명분으로 당 정치국을 복원하는 방법이 구사될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10월께 당대회를 열고 정치국 정위원 및 후보위원을 선거하고, 당비서국의 조직비서를 선임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화폐개혁과 천안함 도발사태의 후유증은 권력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다.

북한의 정책결정이 노동당의 정치국이 주도하는 형국으로 자리 잡아간다면 개혁·개방 등 전향적 정책변화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런 변동은 우리가 원하는 방향일 수 있다. 여기에 천안함 도발 사태에 대한 북한의 사과 등 태도변화가 뒷받침된다면 우리 정부가 대북정책에 있어 새로운 접근법을 시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서재진 통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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