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투자하라면서 투자한 기업을 제재하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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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 12일 SK와 KT 등 6개 그룹의 12개사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의결권 제한과 지분 매각명령, 과징금 등의 제재를 받았다. 공정거래법상 순자산의 25%로 제한된 출자총액 한도를 넘어 출자했기 때문이다.

공정위가 이 같은 제재조치를 내린 것을 두고 탓할 것은 없다. 공정위의 공무원들이야 법이 정해준 잣대에 따라 법대로 처리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대통령부터 기업이 투자를 안 한다고 기업을 나무라면서 정부의 다른 한쪽에서는 기업이 한도를 넘어 투자했다고 제재를 하니 선뜻 납득이 안 간다. 그렇다고 법을 어겨서라도 투자하라거나, 법을 어긴 것을 눈감아 주자는 얘기가 아니다. 법이 기업의 투자를 가로막는 현실이 딱하다는 것이다.

재계는 공정거래법의 출자총액 제한 규정을 없애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해 왔었다. 그러나 이번에 개정된 공정거래법은 이 규정을 그대로 살려뒀다. 오히려 금융계열사의 의결권 제한을 강화하는 내용이 추가됐다. 여당은 시급한 민생법안과 예산안 처리를 제쳐두고 기업들이 그토록 반대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유독 서둘러 통과시켰다. 개정된 공정거래법은 내년 4월부터 시행에 들어가게 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 보고 투자하라면 누가 선뜻 나서겠는가.

그러나 아직 기업의 투자 의욕을 살려볼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재계는 법은 어쩔 수 없게 됐지만 시행령에만이라도 재계의 목소리를 반영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출자총액제를 벗어나는 기준을 낮춘다든지, 출자제한을 받지 않는 예외규정을 늘리는 방법으로 기업의 투자를 부추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마침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도 "시행령에 재계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니 기대해 볼 일이다.

차제에 정부는 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대책도 시급히 마련하기 바란다. 기업들은 금융 계열사의 의결권 제한으로 경영권 위협이 커졌다고 호소한다. 공정위는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무방비 상태에서 경영권 위협이 현실로 드러나면 그때 가서 어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