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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바지 역할’이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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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호 05면

최근 두 오페라 제작사가 같은 작품을 공연했습니다. 18세기 글루크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였죠. 아내를 구하려 지옥을 찾은 오르페우스가 아내의 얼굴을 보지 말라는 규율과 싸우는 이야기 아시죠?

김호정 기자의 클래식 상담실

그런데 캐스팅이 재미있더군요. 한 제작사는 오르페우스 역에 남성 성악가를 캐스팅했습니다. 남자 역에 남자 출연, 당연해 보이죠? 그런데 다른 무대에서는 오르페우스로 여성이 나왔습니다. 비유하자면 송강호와 전도연, 안성기와 김혜자가 같은 역에 캐스팅된 셈이니, 참 이상하죠?

오페라에는 ‘바지 역할’이라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바지를 입고 나와 남성을 연기하고, 청중도 모두 속아 주는 거죠. 무릎 부분에서 끈을 묶는 바지 ‘브리치스(Breeches)’, 승마바지처럼 생긴 중세시대 옷에서 이름을 따 ‘브리치스 롤(role)’로 부릅니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바지 역할이 처음 나왔기 때문입니다. 현대에 와서는 ‘트라우저(Trouser) 롤’, ‘팬츠(Pants) 롤’이라는 용어가 쓰입니다. ‘바지 역할’은 이 단어들을 직역한 거죠.

오르페우스는 바지 역할입니다. 음역 낮은 여성인 메조소프라노가 맡습니다. 또는 남성 중 음역이 가장 높은 카운터테너도 부를 수 있고요.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의 몸종인 케루비노도 대표적인 바지 역할입니다. 백작 부인에 대한 애정에 몸살을 앓지만 주인에게 반항할 힘은 없는, 설익은 남자죠.

이처럼 나약함이 살짝 묻어나는 남성은 바지 역할에 제격입니다. 모차르트는 처음부터 여성이 케루비노를 맡도록 구상했습니다. 베르디 ‘가면 무도회’에서 바지 역할인 오스카 역시 국왕의 몸종이죠. 외화 더빙에서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는 여성 성우가 맡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요? 반대로 요즘 TV에서 조금 여성스러운 남자가 여장을 하고 인기 없는 여성으로 나오는 것도 떠오르죠.

바지 역할은 원래 카스트라토가 하던 것입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거세가 금지되며 카스트라토가 사라졌죠. 또 여성들도 무대에 설 수 있게 돼 카스트라토를 대신했고요. 이렇게 해서 우리가 무대에서 바지 역할을 만나게 됐습니다. 이후 발성법이 발달해 훈련에 의해 높은 소리를 내는 남성 성악가(카운터테너)가 나왔고, 바지 역할은 더 다양한 주인을 만납니다.

이처럼 애매한 지점에 있는 바지 역할은 오페라 연출자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어떤 소프라노는 메조로 전향한 뒤 ‘피가로의 결혼’에서만 네 개의 배역을 맡았다고 합니다. 바지 역할이 출연자의 활용도를 높였다는 걸 알 수 있죠. 캐스팅의 남녀를 결정함에 따라 인물 관계를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지 역할에 영 적응을 못 하는 청중도 있습니다. 극에선 분명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는데 무대 위엔 여자 둘이 노래하고 있으니까요. TVㆍ영화 등의 치밀한 리얼리티에 익숙해진 현대 청중은 더욱 어색해합니다. 리얼리티냐 성부(聲部)의 실험이냐, 오페라 연출자들 점점 골치 좀 아프겠죠?

A 다양한 오페라 만드는 양념

※클래식 음악에 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클래식을 담당하는 김호정 기자의 e-메일로 궁금한 것을 보내주세요.


중앙일보 클래식ㆍ국악 담당 기자. 서울대 기악과(피아노 전공)를 졸업하고 입사, 서울시청ㆍ경찰서 출입기자를 거쳐 문화부에서 음악을 맡았다. 읽으면 듣고 싶어지는 글을 쓰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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