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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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삼월이다. 달력과 관습으로는 봄이 왔지만 어디에도 봄은 없다. 거리의 가로수들도 썰렁한 게 그대로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봄을 찾아 시장엘 가보지만 이상하게 봄나물은 없고, 뚱뚱하게 살찐 겨울배추가 좌판 위에 나란히 누워있을 뿐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봄을 기다리는 대춘부를 쓰고,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고 '춘래불사춘'이라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봄은 마음 속으로도, 기온의 변화로도 오지 않는다. 옷과 화장품을 만드는 회사들과 텔레비전이 지난해, 지지난해의 봄을 리메이크해 봄이 왔다고 주장한다.

시장을 돌아다니다 콩을 파는 할머니에게서 2천원어치 콩을 산다. 풋콩처럼 보이는 게 싱싱해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 할머니는 물에 불린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럴 것이다. 어디서 지금 풋콩이 나겠는가. 봄에 대해 자꾸 생각하자 오래 전 초등학교 시절 배운 동시가 떠오른다. "입김으로 호호 유리창을 흐려놓고 썼다간 지우고 또 써보는 글자들 봄, 꽃, 나비", '개나리 노오란 꽃 그늘 아래…'하는 동요도 떠오른다. 그러니까 봄은 동요나 동시 속에만 있는 것일까.

그래서 늘 봄이면 상투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제비, 새싹, 봄바람, 민들레…하지만 봄에 그것들을 본 적이 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제비는 언제 보았는지 멸종되었다는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살아 있기는 있을 텐데. 그러니까 동시나 동요 속의 봄이 진짜 봄 같고 봄은 어디에도 없는 것만 같다.그러다 갑자기 꽃이 피면 당황한다. 봄이구나. 이런 봄이구나. 꽃이 피어버렸구나. 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도 봄이 정말로 눈에 들어오면 당혹스러운 것이다. 계절의 변화에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가 익숙해질만 하면 봄은 갑자기 여름으로 건너뛰어 버린다.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을 들어서자 꽃차가 서있다. 마치 주문받은 봄을 배달하러 온 것처럼 보인다. 꽃차에는 사람이 없다. 차에 실린 꽃도 봄꽃은 아니다. 이제 계절도 인공적이 되어서 마구 뒤섞여 혼란스럽다. 그럴 수밖에 없다. 봄만 해도 회사들이 보여주는 봄, 방송이 보여주는 봄, 어릴 적에 이미지화된 봄, 그리고 계절상의 봄이라는 적어도 네겹의 봄이 한꺼번에 겹쳐 있으니까.

<화가·대중문화 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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