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노인실직 본격 사회문제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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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난 변화가 싫어, 싫단 말이야, 그런데 왜 자꾸 바뀌는 거야-."

평생을 세일즈맨으로 살다 60을 훌쩍 넘긴 윌리 로먼(더스틴 호프먼)이 벌컥 화를 낸다. 화근은 사소한 것이다. "치즈를 미국산으로 바꿨다"는 아내(케이트 리드)의 말 때문이다.

변화에 대한 그의 불만은 끝이 없다. 아들과 함께 놀던 나무도, 채소를 심었던 땅도 모두 사라졌다. 자꾸만 건물이 들어서는 것, 사람이 많아지는 것도 싫다. 온통 불만 투성이다.

하지만 정작 견딜 수 없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자신이 노인이 됐다는 사실이다. 운전 중에도 졸음이 쏟아져 사고를 내고 정신이 오락가락해 집중하기도 어렵다.

수입이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괴롭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아무 것도 팔지 못한다. 직장이야 다니지만 돈 한푼 못받는 처지다. 자꾸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죽은 형의 환영이 자주 보인다.

1949년 초연된 아서 밀러의 원작 '세일즈맨의 죽음'은 전 세계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았다.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다. 폴커 슐렌도르프의 85년 작품은 그 중에서도 특히 명품으로 대접받는다.

이제 이 작품은 '실직 노인의 죽음'으로 바꿔 부를 만하다. 많은 국가에서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 보고서는 60세 이상 노인 인구가 2050년에는 5명 중 1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2020년께 주요 선진국들은 모두 고령사회(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 비율 14% 이상)가 된다.

경제도 변할 수밖에 없다. 실버산업이 번창하고 개인들은 연금에 목을 매며 정부의 재정 부담이 커진다. 전문가들은 주식과 부동산 시장도 달라질 것으로 내다본다. 더 이상의 경제성장은 어려우리란 전망도 있다.

문제는 이런 변화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진국 정부도 뾰족한 방책을 쓰지 않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어느날 갑자기 세계경제에 거센 파도로 닥칠 것이다. 그래서 세계보건기구는 고령화를 가리켜 '조용한 혁명'으로 규정했다.

노인 입장에서 고령화 사회는 당장 연금 및 사회보장비 삭감이란 두려운 현실로 다가온다.

이를 '필연'으로 보는 전문가들은 노인에게 일자리를 찾아주자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청장년층의 실업도 많은 판에 노인의 몫을 찾기는 쉽지 않다.

자원봉사를 중심으로 한 '제3부문'이 관심을 끄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공공부문(제1부문)·민간부문(제2부문)으로 구성되던 경제 시스템에 제3부문을 추가해 노인에게 일자리를 찾아주자는 주장이다. 기부금과 세금으로 운영되는 자원봉사 부문은 사회를 윤택하게 만들 수 있어 더욱 주목된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현대인에게 논리가 아닌 감동으로 노인 문제를 느끼게 한다. 해고되자 2만달러의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자살을 감행한 노먼은 우리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한국이 고령사회로 진입하는 시기는 2020년. '세일즈맨의 죽음'은 지금의 40대가 맞아야 할 충격적인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몇개월치 보험료를 내지 못한 탓에 가족들이 보험금을 받지 못한다는 구성은 현실의 냉정함을 깨닫게 한다.

48세의 나이로 63세 노인역을 완벽하게 소화한 호프먼의 연기력과 할리우드의 분장술이 놀랍다. 79년 '양철북'으로 뉴저먼시네마 운동의 리더가 된 슐렌도르프 감독이 왜 명장으로 불리는지를 알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재광 경제연구소 기자

세일즈맨의 죽음

▶원제=Death of a Sales man(1985)

▶원작=아서 밀러

▶감독=폴커 슐렌도르프

▶주연=더스틴 호프먼, 케이트 리드, 존 말코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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