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up] 5연임 박종원 코리안리 사장 “전문경영인은 똑똑한 며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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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며느리 역할을 한번 해 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월급쟁이 전문경영인이지만 오너에게 똑 부러지게 할 말은 했습니다. 그리고 직원들과 사랑으로 서로 믿는 관계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신뢰의 조직문화가 형성되자 회사 살림살이가 쑥쑥 커지더군요.”

박종원(66·사진) 코리안리 사장이 11일 주주총회를 거쳐 5연임에 들어간다. 임기를 마치면 사장 생활만 15년. 국내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 중 최장수 기록이다. 주총을 앞두고 만난 박 사장은 “이제 기업이든 사회든 우격다짐은 통하지 않는다”며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주지 않는 CEO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코리안리는 오너와 전문경영인 간의 관계가 잘 정립된 회사로 꼽힌다. 박 사장은 “한국 기업들이 부쩍 커지면서 이제 오너들이 경영에 일일이 간여하기 힘든 상황을 맞고 있다”며 “오너는 큰 틀의 기업 전략과 모니터링에 집중하고, 일상 경영의 권한은 전문경영인들에게 철저히 위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사장은 경제관료 출신의 CEO다.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14회)에 합격, 재무부 총무과장·재정경제부 공보관 등을 거쳐 1998년 코리안리(당시 대한재보험) 사장이 됐다.

박종원 코리안리 사장은 1944년 생으로, 칠순을 바라보고 있지만 나이를 잊고 산다. 그를 처음 보는 사람은 10년 이상 젊게 본다. 비결을 묻자 “항상 미래를 바라보며 살기 때문인 것 같다. 긍정적 사고를 무기로 난관을 돌파해 나가다 보면 나이 들 겨를이 없다”며 웃었다. 해병대 출신인 박 사장은 직원들과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겨울이면 매 주말 스키장을 찾을 정도로 강철 체력을 자랑한다.

-5연임에 성공하면서 한국의 최장수 전문 경영인의 반열에 올랐다.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다고 들었다.

“지금은 좋아졌지만 내가 처음 사장으로 왔을 때 이 회사는 난파선이나 마찬가지였다. 과거 공기업이었던 타성이 남아 직원들은 현실에 안주하는 소극적인 영업 행태에 젖어 있었다. 때마침 닥친 외환위기로 보증 섰던 회사채들이 휴지 조각이 되면서 영업손실이 3000억원을 넘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철저한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재건했다. 부실 자산을 정리하고 인력을 줄였다.”

-직원들의 반발이 컸을 텐데.

“왜 없었겠나. 그러나 기업의 정신인 조직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재기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밀어붙였다. 나 스스로 창업주라는 생각으로 솔선수범했다. 호되게 일하면서도 저녁이면 직원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애로를 들었다. 드디어 직원들이 나를 믿고 따라 주기 시작했고, 모두의 노력은 실적으로 나타났다.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따라 주지 않으면 최고경영자(CEO)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죽은 조직이다.”

-관료 출신이기에 어려움은 없었나. 정부와 기업은 일하는 방식이 많이 다를 것 같은데.

“나는 낙하산으로 이 회사에 왔다. 나 스스로도 ‘내가 무슨 능력이 있겠나, 한 번만 하면 끝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을 해 보니 관료 출신으로서 나의 역량이 쓸 만하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과거에 보지 못했던 나만의 끼도 발견했다. 관료로 닦은 거시적 안목에 창의성을 결부시킨 결과 나름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음식도 손맛에 따라 다르듯 나름 공무원 출신들이 낼 수 있는 손맛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젠 좀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들 법한데.

“그런 생각이 왜 없겠나. 그래도 내가 뿌려 놓은 씨앗에 대한 부담이랄까, 책임감이랄까 그런 것도 떨치기 힘들다. 아무튼 회사가 잘 굴러가는 것을 보고 물러날 때가 되면 즐거운 마음으로 떠날 것이다. 남은 시간 내 뒤를 이어 회사를 끌고 갈 리더들을 육성하는 데도 힘을 쏟고 싶다.”

-회사 실적이 꾸준하지만 주가 흐름은 답답하다. 불만스러운 주주들도 있을 것 같다.

“성장성의 한계 때문이라고 본다. 국내 시장에선 충분히 클 만큼 커서 새로운 수익원을 찾기가 힘든 게 현실이다. 이젠 눈을 밖으로 돌려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다. 현재 18%인 해외 매출 비중을 2015년에 35%, 2020년엔 50%까지 높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기 위해선 해외 전문가 육성이 선결 과제다. 직원의 10%씩을 매년 해외로 연수 보내 정보를 얻고 인맥도 구축하도록 하고 있다. 다만 절대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역량이 쌓이는 수준에 맞춰 해외 사업을 확장할 생각이다.”

-코리안리가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직장이 됐다. 시중은행에 동시 합격한 사람도 코리안리를 선택한다는데 어떻게 해야 여기에 들어올 수 있나.

“우리는 야성이 살아 있는 사람을 뽑는다. 실력과 정신력이 강해도 체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선발하지 않는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꼭 야외 면접을 본다. 등산과 축구, 술자리 등을 통해 선배들이 지망생들을 밀착 테스트한다. 이를 통해 협동정신도 본다. 자기만 아는 실력자는 낙방이다. 우리는 전공을 안 본다. 미대를 나오고 공대를 나온 사람도 뽑았다.”

김광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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