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말하지 않은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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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부시 왈 "고이즈미(小泉) 총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고이즈미 대답 왈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경제개혁 추진에 뜨거운 격려를 받았다." 이렇게 머리를 조아리며 얻으려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기자회견에서 고이즈미는 "부시 대통령은 나에게 자신과 용기를 주었다"고 찬사를 거듭했으나, 회견 뒤 자민당 간부들에게는 "부시가 지나치게 말이 많더라. 보기에 아슬아슬했다"고 심중을 밝혔다.

부시 대통령에게 말은 힘이지 말이 아니다. 아시아 3국 순방을 앞둔 특별회견에서 그는 북한이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려면 대량살상무기(WMD)를 확산시키지 말아야 하며 "김대중 대통령에게 아주 정중한 방법으로 이런 입장을 분명히 전달할 것"이라고 했다. 그 정중한 방법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이런 말은 金대통령이 무기확산 금지 같은 국제사회의 도덕을 모르거나 반대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부시는 또 한반도의 한쪽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감옥에 갇히고, 자유롭게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부와 기회를 누리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 포용 여부 때문이며, "한국인들에게 그 말을 전하고 싶다. 한국에 달려가고 싶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도 했다. 그 말을 전하기 위해 달려올 필요는 없었다. 그가 말하는 자유의 소중함 정도를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은 "자유를 신봉하고" 또 "강력히 옹호하는" 자유의 투사인데, 상대가 그것을 몰라서 답답하다는 말이다.

나는 부시를 '악의 화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선의 화신'으로 믿는 것 같아 걱정이다. 북한 주민에 대해 그는 "자유가 없고, 지독한 기아에 시달리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그들에게 비통함을 금치 못한다"고 말했다. 부시의 정치 이력으로 미뤄 북한의 부자유와 기아의 비통함 '따위'를 언제 그렇게 생각했을지 의문이지만, 그럼에도 식량 지원을 계속하겠다는 그의 '인도주의'는 박수를 받을 만하다. 문제는 그 배후의 단선적 사고다. 예컨대 "누군가의 머리에 장전한 총을 겨누고 있다면 한반도의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그의 말은 백 번 옳다. 그러나 상대도 똑같이 "내 머리에 장전한 총을 겨누고 있다면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반박할 것은 왜 생각하지 않는가? 열전과 냉전으로 갈가리 찢긴 지난 반세기 한반도의 역사가 바로 그런 대결의 산물이었다.

부시 외교의 비극은(?) 좋게 말해 선의와 독선의 혼동에 있다. 내가 이렇게 좋은 일을 하려고 하니 너희는 나를 따르라는 식이다. 당신의 생각만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주위의 생각은 아예 생각조차 않는 것이다. 일례로 그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확산에 대한 자신의 우려에 한·미 양측이 "솔직한 대화를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이 맥락에서 '솔직한'이란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우리 정부가 그의 우려를 신중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으니 정색을 하고 물어보겠다는 말 아니겠는가? 북한을 이미 악의 축으로 결론 내리고 나서, 혹시 이견이 있는지 '솔직한' 답변을 바란다는 것은 미국의 '솔직'을 그대로 따르라는 강요일 수밖에 없다.

부시 방한에서 우리의 관심은 무엇을 말하느냐 못지 않게 무엇을 말하지 않느냐에 있었다. 한·미 정상회담 뒤의 회견에서 부시는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한반도에 전쟁이 없다니 천만다행이지만, 그럼에도 '내 머리에 총구' 관념이 바뀐 것은 아니다. 도라산역의 연설에서도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정권이 가장 위험한 무기로 우리를 위협하는 것을 결코 허용할 수 없다"고 벼르던 말을 했다.

반면에 악의 축, 재래식 무기 등 우리가 바라지 않는 말은 하지 않았다. 불씨가 꺼진 것이 아니라 덮어두자는 뜻이리라. 그것이 金대통령을 뜨겁게 격려하고, 자신과 용기를 주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악의 제국으로 부르면서도 대화를 계속한 레이건의 전례 거론이 "대단히 좋은 말씀"이라면, 악의 축과도 대화는 바라지만 어서 무너져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을 터이다. 한반도 긴장완화에 우리도 말 좀 하자. 우리 얘기도 좀 들어보라는 것이 햇볕정책의 핵심이었다면 당분간 그 얘기를 다시 꺼내기는 어려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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