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訪韓후 남는 문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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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으로 한껏 고조되었던 한·미간 갈등이 한·미 동맹의 확대강화와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표명 선에서 일단 봉합됐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은 이제부터다. 양국 정상이 합의한 대로 한·미 동맹이 확대 강화되고 정쟁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남·남 갈등'이 진정으로 해소되려면, 정부가 대북정책의 방향과 내실을 재조정해 나가야 한다.

그간의 갈등은 정부가 북한의 개혁·개방과 한반도의 평화정착이라는 대북정책의 목표보다 '햇볕'이라는 정책수단을 더욱 중시한 데서 빚어진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에 대한 사려 깊지 못한 대응과 그로 인한 한·미 갈등, 남·남 갈등의 증폭도 마찬가지였다.

'악의 축' 발언과 그 후의 여러 사태는 역설적으로 북한문제와 한·미관계의 본질을 밝히고, 해법을 찾는 데에 좋은 계기를 마련해 주는 측면이 있다. 중대 외교현안을 정쟁화하지 말고 전화위복의 호기로 삼아야 한다. 해법은 '악의 축' 발언에 담긴 복합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대북정책의 목표와 수단의 혼동을 정리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에는 여러 측면의 의미가 함축돼 있다. 우선 그 발언에는 미국, 특히 공화당정권의 패권주의적 발상과 독선적 가치관이 나타나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상대를 악마로 보는 십자군적 선악관은 대화와 협상에 역작용을 하고 긴장을 고조시킨다는 점에서, 우리가 미국에 비판적 주문을 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한 비판과 주문은 어디까지나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한·미 공조 차원의 것이어야지 마치 북한이 동맹국이고 미국이 적국인 양, '반미'를 선동하는 식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

둘째, '악의 축' 발언은 연두교서의 전체 문맥과 미 당국자들의 자세를 종합해 볼 때, 대북 '선전포고'라기보다 '대화에의 압박'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전쟁 위험'운운하며 과잉반응을 하기보다 북한에 대화를 권장하는 노력이 더 긴요하다.

셋째, 그것은 '9·11 이후 시대'의 미국의 새로운 국가 목표와 세계전략인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극적으로 나타낸 표현이다. 미국의 이 새로운 국가 목표와 세계전략은, 햇볕정책의 구미에 안 맞는다며 우리가 비판한다고 해서 포기될 성격의 것이 아니다. 현실적 지도자라면, 한·미 동맹의 결속은 불가피하게 이 틀 속에서 모색돼야 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넷째, 부시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밝힌 북한인식 곧, 북한정권은 '인민을 굶주리게 하면서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한 정권'이라는 인식은 사실적으로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악의 축'이라는 표현이 문제의 본질이라기보다 북한정권의 체질에 해결돼야 할 문제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다섯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시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북한에 제기한 구체적 문제, 곧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의 해결은 미국의 과제이기 이전에 '우리의 사활'이 걸린 '우리의 중대현안'이다.

다만 이 문제는 그간 주로 미국이 북한과의 교섭을 담당하는 역할분담을 해 왔을 뿐이다. 시정돼야 할 것은 미국의 문제 제기가 아니라 "북한의 대량살상무기는 방어용이고 대미교섭용일 뿐"이라는 정부 당국자의 어처구니없는 인식인 것이다.

미국의 새로운 세계전략의 관점에서 보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의 해결문제는 이제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의 문제가 됐다. 그리고 그 해답은 북한의 자세에 달려 있다.

앞으로 우리의 대북정책도 그 명칭이 무엇이든 근간은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생화학무기를 포함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의 해결에 있어 목표는 미국과 보조를 맞추되 수단은 대화가 주축이 되도록 대미외교 역량을 발휘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정권에 대해 '핵과 미사일'이 아닌 '개혁과 개방'만이 남북이 공생하는 길임을 설득하는 일이어야 한다. 북한문제에 관한 한 대일외교, 대중외교, 대러외교 할 것 없이 초점을 위의 두 가지 점에 맞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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