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가 일으키는 불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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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99년 이후 증오를 소재로 한 노래가 많은 것을 알고 놀랐다. 남성보컬그룹 스페이스A가 부른 '증오'는 "잘 될 리 없어, 내가 보장해, 내 눈에 흐른 눈물만큼 너는 피눈물을 흘리며, 결국 벌 받으며 살게 될걸"하는 섬뜩한 가사로 돼있다. 젊은이들이 흥얼거리는 노바소닉의 '증오'는 더욱 그러하다. "이제 두고 봐, 모두 다 전부 다, 이젠 내가 너를 왈칵 물어주지-침속에 그 독에 나의 목에-내가 당한대로 갚아주지-이제 너의 방식대로 돌려주지."

또 지퍼가 부른 같은 제목의 노래도 증오의 폭발을 예고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이 3개의 '증오'는 자신이 따돌림 받는 이유를 오로지 상대측에 돌리고 화해의 여지도 전혀 남기지 않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사이버 세계를 누비고 있는 일부 네티즌의 언어는 이미 미움의 단계를 넘어선 것이다. 특정인에 대한 증오도 확산시킨다. 증오의 음악도 흘려 보내고 이를 상품화한다. 이 흐름이 어디까지 세를 넓혀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이버를 통해 친엄마를 청부 살인한 혐의를 받고 있는 어느 딸의 이야기가 며칠 전에 알려지면서 우리는 경악했다. 서서히 머리를 내밀고 있는 '복수(復讐)산업'이 결코 일과성은 아니다.

우리는 미워하는 사람들과 공존한다. 만나고 일하면서 마찰이 생기게 마련이고, 의견조정 과정을 거쳐 새로운 방안을 찾는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복수의 충동에 묻혀 있다. 보통의 미움이 덩어리져서 절대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말한 바에 따르면 명예를 뺏기지 않는 사람들, 소유물을 그대로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불만이 없다. 이것을 빼앗긴 사람들은 고금동서를 가리지 않고 원한에 사무쳐 지낸다.

지난달 하순 어느날 저녁 서울 북창동의 큰 식당에서 겪은 일이다. 50대 중반의 신사가 친구로 보이는 사람들과 식사 중에 큰 목소리로 특정 정치인에 대해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주인이 큰일 날 말을 한다고 말렸으나 그는 이에 아랑곳없이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저주의 단어를 쏟아냈다. 우리는 누군가를 증오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나는 그가 내던진 무지막지한 말 때문에 어느 기관에 불려가 조사받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각자가 갖는 증오의 감정에는 어느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비판도 아니고 더구나 비난도 아닌 보다 심각한 증상이 깔려 있을지 모른다. 정권에 대한 증오, 정치인 및 관료에 대한 증오가 지나친 나머지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들을 내놓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내놓은 일부 정책안과 견해들은 격렬한 감정과 증오의 프리즘을 거쳐 나오면서 왜곡되고 현실성조차 없어 보인다. 그들은 주변으로부터 많은 동조를 받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통찰의 힘을 상실했다. 매섭게 따져 나갈 수 있는 비판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증오의 포로가 됐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성은 어디로 갔으며 그들의 합리성은 또 어디에 버려졌을까.

예를 들어 나는 YS의 DJ에 대한 증오감의 표출을 볼 때마다 좀 격조가 있었으면 하고 늘 생각한다. 76년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체포된 윤보선 전 대통령의 법정 진술을 기억하고 있다. "재판장, 어려운 일이 많을 줄 압니다. 그러나 그걸 물리치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그런 식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그를 증오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저주도 없었다

지성인이라면 증오의 감정을 소화시켜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증오의 확산이 가져오는 배척과 충돌이 우리를 얼마나 피곤하게 만들고 있는지 짐작이나 하는가. 이제 정말 에누리 없이 이치를 따져가는 냉정이 필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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