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기업 해외매각] 2. 하이닉스반도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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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해외매각을 통해 부실기업을 정리하겠다는 한국의 계획은 늘 말이 앞선 감이 짙다. 현대 금융 3사와 대우자동차 처리가 아직도 결론을 내지 못한 것이 그렇다. 하이닉스반도체 협상 역시 좀더 지켜봐야 한다. "

미국 유력언론의 최근 기사는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의 하이닉스 인수협상에 대해 이렇게 꼬집고 있다. 불과 열흘 전에 난 이 기사는 AIG 인수 협상의 결렬을 마치 예고한 듯하다.

2년을 끈 AIG 협상에 비해 하이닉스는 논의를 본격 시작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협상의 밀도와 긴박감을 보면 금세 결론이 날 듯한 기세다. 양쪽의 입장 차이가 벌써부터 뚜렷이 드러날 정도다.

양사 모두 협상을 서두르고 있어 성사가 되든 안되든 이르면 다음달 중 결말이 날 가능성이 높다. 쌍방 모두 통합에 미련이 많기 때문에 하이닉스 매각의 금액.범위 등을 놓고 시각차를 좁히느라 협상이 장기화할 가능성도 있다.

◇ 숨가쁘게 돌아간 두 달=국적이 다른 세계 2,3위 메모리 반도체 업체가 합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세계 정보기술(IT)산업의 지각변동을 초래하는 국제적 빅딜인 데다 상이한 설비.기술.시장 구조와 시너지 효과 등 따질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협상의 진척 속도는 유례가 드물게 빠르다.

두 회사는 지난해 12월 3일 제휴를 선언한 뒤 발표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마이크론 쪽에서 대규모 협상.실사단을 한국에 보내 왔다. 연말연시에는 양사 최고경영자가 핑퐁식으로 상대방 회사를 찾아 사안의 무게를 더했다.

하이닉스의 D램사업을 매각한다는 기본합의가 나온 것(지난달 28일)도 제휴 발표 후 한달이 못된 시점이었다. 박종섭 하이닉스 사장은 이달 안에 두번째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크론의 협상안에 대한 우리쪽 입장을 전할 것으로 알려졌다.

일이 이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은 양쪽 다 서둘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10조원 가까운 부채에 허덕이는 하이닉스야 그렇다 치고 마이크론 역시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식으로 배짱만 부릴 처지가 아니다.

채권단 관계자는 "마이크론은 이번 협상을 삼성전자를 제치고 세계 메모리 산업의 패권을 차지할 다시없는 호기로 삼은 것 같다"고 말했다.

◇ 인수가격이 쟁점=마이크론이 하이닉스를 인수하는 데 얼마를 줄지, 또 어디까지 인수할지가 가장 큰 관심사다. 두 회사 모두 협상 내용을 비밀에 부치고 있지만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만 꿰맞춰도 양쪽 입장이 팽팽히 맞서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이닉스 채권단에 따르면 마이크론은 하이닉스의 D램사업 또는 D램을 포함한 메모리 사업을 인수하는 데 30억~35억달러 가량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비메모리(또는 비D램)부문에는 25%(옵션 5% 포함)의 지분을 투자해 독자 생존할 수 있게 한다는 것.

하지만 채권단은 이런 흥정에 부정적이다. 하이닉스의 영업권과 최근 반도체값 상승 추세 등 '플러스 알파'요인을 반영해 50억달러 이상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채권단 관계자는 "이 정도는 돼야 하이닉스의 금융기관 부채(6조원)를 대체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매각범위도 숙제다. 채권단은 회사를 통째로 팔거나 아니면 D램을 포함한 메모리 사업 전체를 파는 쪽을 선호하고 있다. 이 역시 부채를 쏙 빼놓고 자산만 가져가려는(P&A 방식) 마이크론 쪽과 상반된 입장이다.

근래 반도체 값이 크게 오르면서 헐값 매각을 감수하느니 독자생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서울대 김형준(재료공학) 교수는 "8인치 반도체 웨이퍼 생산라인 두개 정도 짓는 값에 불과한 돈을 받으면서 한국이 확고한 1위를 하는 산업을 외국에 파는 것을 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채권단 관계자는 "1백28메가D램 시세가 2달러(현재 4달러 육박)일 때 만들어진 실사 보고서를 토대로 하이닉스 매각대금을 정해서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홍승일.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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