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시론] 방송위원회 있으나마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지금 우리나라 방송계는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다.

편파방송과 불공정 보도는 관행처럼 돼 왔고 감각적이고 표피적인 오락 프로그램은 화면에 쏟아지고 있다. 지상파 방송과 케이블 텔레비전 그리고 위성방송을 총괄하는 '민간합의제 행정기구'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방송위원회는 최고 정책과 규제를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권위와 권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 위상 ·권한 기형적 기구

방송계에는 조속히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지상파 텔레비전의 디지털화 추진과 위성방송의 조기 정착, 그리고 지역방송의 균형발전, 한민족 글로벌 네트워크 건설 등이 발등에 불이 아닌가.

그러나 개혁이란 이름으로 국민의 정부가 추진해 온 방송법 개정, 방송영상 정책등은 퇴행과 혼란만 가중시킨 결과 위원장 사퇴라고 하는 오늘의 위기를 자초했다.

무소신 무능력으로 일관해 온 방송위원회는 안팎의 비판과 도전에 직면,'있으나 마나' 유야무야한 존재로 전락했다. 장관급 위원장에 차관급 상임위원이 셋이나 있는 공무원 중심의 기구인데도 정부조직법은 어디에도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인허가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데도 정작 민간기구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위상이 애매한 만큼 권한도 이현령 비현령으로 돼 있다. 편성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법 취지가 무색하리만큼 위원회는 방송 편성과 내용,그리고 방송 경영을 평가하겠다고 나서서 자가당착을 빚고 있다.

방송위원회의 확실한 권한은 KBS.MBC의 이사진 선임과 EBS의 이사진.감사.사장의 선임이고 프로그램에 대한 심의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이 두 가지 기능은 없는 것보다 오히려 못하다. 방송정책을 입안하고 제도와 내용을 규제하는 기관이 방송사의 경영진 구성에 직접 간여하는 일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더욱이 프로그램 심의는 위헌적 요소를 갖고 있다. 따라서 심의야말로 한국방송협회와 같은 민간 자율기구가 담당하도록 개선해 나가야 한다.

또 방송위원회의 위원 선임방법은 이대로 좋은가□ 9명의 위원은 대통령이 3인, 국회의장이 3인, 그리고 국회 문화관광위원회가 3인씩 선임토록 돼 있어서 자칫 여야 '정쟁의 마당'이 되기 쉽다.

더구나 전문성이 부족한 인사와 정치적 배려로 선정된 분들로 채워진 위원회가 밥그릇 싸움으로 세월을 보낸다면 위원회가 제 몫을 해낼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는가. 뉴미디어 정책은 국민의 정보복지 향상과 매체간의 균형발전을 고려해서 입안되고 실천돼야 한다.

교과서적인 원론은 채널의 구성이나 키국의 전국 재송신 등 모두가 넓은 뜻으로는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 다만 현실을 십분 반영해 이종 동종 매체간의 조화와 지역 간의 공존공영을 전제로, 그리고 기존 자원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중요 정책이 결정돼야 한다.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무엇 때문에 정책과 행정적 가이드가 필요하겠는가.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나라 방송정책은 한마디로 '쓰레기통 모형'이었다.

몇가지 예만 들어보자. 광고방송을 점차 줄여가야 할 KBS는 거꾸로 제2FM조차 상업화했다. 그나마 방송위원회가 광고방송을 '비밀리'허가해놓고 두달이 지나서야 슬그머니 발표했다.

국민의 공론을 거쳐서 결정해야 할 중대사를 밀실에서 야합한 꼴이 됐다. 케이블 TV의 경마 중계 허용은 복권 공화국답게 방송을 투전판으로 만든다는 비난을 샀다.

*** 정략 따른 정책표류 우려

방송구도를 새로 짜야 한다. KBS의 수신료를 현실화하고 국가기간방송으로서 걸맞은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서 '교육방송'과 '국제방송'을 흡수 통합해야 한다.

MBC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케이블, 인터넷, 위성TV 플랫폼 사업, 그리고 일산 부지 매입 등 부적절한 '과잉'투자에 대해서 누군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뿐 아니라 민영화냐 현체제 고수냐를 둘러싸고 또 한번 시련을 맞을 것이다.

늘어나는 종교방송은 어떻게 할 것인가? 선거철이 다가온다. 과거 방송사 허가권이 득표의 수단이 된 적이 있다. 우리와 같은 다원종교사회에서 지상파방송이 선교의 수단이 돼도 좋을까. 표준FM 문제도 재검토가 필요하다. 원래 취지와 다르게 같은 내용의 프로그램을 AM과 FM으로 동시에 송출하는 것은 전파의 낭비이기 때문이다.

모쪼록 새 방송위원장에는 정치적 색깔이 없는, 강한 리더십과 높은 전문성을 갖춘 인물이 선임될 것을 기대해 본다.

金寓龍(한국외대 정책과학대학원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