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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호 기자의 철학 에세이] 박정희 신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신화(mythology)는 인간의 피와 살이 녹아 있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만큼 기본적으로 허구이다. 신적(神的) 상징을 통한 비약과 상상력이 그 허구를 만들어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허구가 무의미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신화는 인간욕망의 투영이자 현실의 반영이며 상상력의 표현인 만큼 문학적.예술적.지적 유산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신화가 없는 사회란 상상력이 고갈된 꿈이 없는 사회이다. 우리의 욕망.현실.상상력을 투영해내는 신화와 그 속에 담긴 신화적 삶이 없다면 미래와 풍요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니체가 현대 과학주의가 낳은 지식욕을 '신화의 자궁'의 상실로 표현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미셸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에서 근대적 지식(epistme)이 이같은 신화적 상상력을 배제.억압하고 이를 제도화.규격화하면서 권력화하는 과정을 그린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지난해 말 국정홍보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국민은 박정희를 이순신.세종대왕보다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의 진실성을 떠나 박정희에 대한 선호는 가위 신화적 수준이다. 이런 신화에 기대 박정희를 정치적 후광으로 이용하려는, 죽은 자를 통해 산자들의 실리를 챙기려는 정치적 푸닥거리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놓쳐서 안될 것은 신화와 현실은 그 코드가 다르다는 점이다. 꿈이 현실의 반대이듯이 신화는 우리의 욕망.현실.상상력을 거꾸로 그릴 수도 있다. 꿈을 현실에 그대로 대입할 수 없는 것처럼 신화도 그 현실의 의미를 제대로 밝혀내기 위해선 해독이 필요하다.

'박정희의 권위주의=경제발전'도식이 가능했던 것은 냉전 하에서 국가가 시장과 시민사회를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론의 대가 오도넬도 라틴 아메리카와 달리 우리의 권위주의가 경제성장으로 이어진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시대적 높이가 달라졌다.

민주화로 국가.시장.시민사회는 서열 체계에서 벗어나 균형사회로 이동했다. 이제 국가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형태의 유치한 리더십은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사회가 그만큼 분화.발전해 국가권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DJ개혁의 실패가 보여준 역사적 교훈도 이제 정치권력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지났다는 것이다.

10여년 전만 해도 대학교수는 도청을 걱정해야 했고 학생 때문에 수사기관에 다반사로 불려가야 했다. 시민들도 옆사람과의 귀엣말까지 눈치를 봐야 했다. 지금 누구도 이런 시대를 꿈꾸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이를 그리워한다면 폭력적 권위에 이익을 얻은 자뿐일 것이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박정희 신화는 거꾸로 읽을 필요가 있다.박정희 신화는 박정희 자체에 대한 기대라기보다 '리더십 빈곤'의 반영이다. 그것도 아직 우리 마음 속에 남아있는 권위주의 문화에 영합한 '퇴행적 반영'이다.

민주화 이후 권위주의적 리더십은 붕괴해 버렸는데 전향적.민주적인 리더십은 창출해 내지 못한 대안부재 현상을 투영하고 있다. 박정희 신화는 역설적으로 박정희와의 단절과 새로운 리더십을 요구한다. 만약 이를 읽어내지 못하고 박정희를 바로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대입하려 한다면 그들의 철학적 빈곤은 어떤 꿈도 줄 수 없을 것이다.

김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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