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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보기] 이인제가 얼굴 편 사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한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주당 이인제 고문이 청와대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이상주 비서실장.

"대통령을 뵙게 해주십시오."

독대를 신청한 것이다.

"여쭤보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청와대는 순간 긴장했다. 솔직히 말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대통령이 경선중립을 표방한 상태였다. 때문에 당쪽 사람은 만나지도 않고 있었다. 혹시라도 중립의지가 훼손될까봐서였다.

그런데 경선주자 중 한사람을 만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주자의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시점도 아주 미묘했다.

결론은 쉽게 내려졌다."안된다"였다.

청와대 관계자의 얘기를 들어보자.

"깜짝 놀랐죠. 李실장이 대통령께 보고를 드린 걸로 알고 있어요. 보고 드리기 전에 이미 안된다는 결론은 내린 상태였죠. 대통령도 곤란하다는 건의를 받아들였던 걸로 알고 있어요."

李실장은 李고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유럽순방 후에 다시 얘기하시지요."

"알겠습니다."

李고문도 큰 기대는 안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李고문은 왜 독대를 신청했을까. 측근은 이렇게 설명했다.

"답답했던 거죠. DJ의 의사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총재직 사퇴 이후 아무런 메시지가 없었거든요."

당시 李고문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DJ가 유럽순방에 나서면 보름은 걸린다. 그 사이 민주당은 전당대회 문제 등을 논의할 예정이었다. 나름대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 고심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흘 뒤 청와대 관계자를 만났다.

"대통령은 지방선거 이전에 후보가 확정되길 희망하는 것 같습니다."

듣기에 따라선 의미가 없는 얘기였다. 누가 후보가 되길 희망한다는 얘기도 아니었다. 특히 민주당의 전반적 분위기도 그렇게 돌아갔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는 李고문측은 달랐다. 대통령의 희망이 자기주장과 다르지 않다는 게 중요했다. 정계개편론에 너무 시달렸기 때문이다.

李고문이 3金포용론을 얘기한 것도 정확히 이때다. JP와의 관계개선 조짐이 보인 것도 이즈음이다. 그렇다면 청와대 관계자는 왜 그런 얘기를 했을까.

의도된 것일까. 그야말로 지나가는 얘기였을까.

李고문측 관계자는 "그가 찾아온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청와대 관계자의 말은 다르다.

"여러 명이 모이는 자리가 있었어요. 다른 얘기를 하다가 내 느낌을 말해줬을 뿐이에요. 실제로 당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갔잖아요. 대통령은 당이 알아서 하라고 했죠. 그걸 그대로 인정하겠다는 게 중요한 얘깁니까."

별거 아닌 얘기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얼마 뒤 민주당 발전쇄신특위는 3월 전당대회를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李고문 뜻대로 됐다. 물론 복병도 있었다.

한화갑 고문이 반대에 나섰다. 그러나 그도 최근 한발 물러섰다. 대세라면 수용할 수 있다는 쪽이다. 실은 민주당으로서도 애시당초 선택의 폭이 작았다. 때문에 대체로 그렇게 될 것으로 봤다.

결국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뭔가가 개입할 여지도 흔적도 없었다. 그러나 DJ 입장에선 한가지를 정리했다. 李고문의 반발가능성이다. 비서관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로 말이다. 9단의 정치엔 운(運)도 따르는 걸까.

이연홍 편집위원(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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