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정현종 '좋은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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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서 그 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 봄 그 밤나무는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었습니다.

-정현종(1939~),'좋은 풍경'

시인이 실제로 목격한 것이 '그 짓'하는 남녀 한 쌍이었는지 일찍 꽃핀 밤나무였는지 아니면 그 둘 다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젊은 남녀도 아니고 밤꽃도 아니고 그냥, '얼떨결에'라는 부사입니다.

어쨌거나 나는 이 시를 읽고 난 뒤부터 눈이 와서 날이 푸근해지면 은근히 밤나무가 많은 숲 쪽으로 올라가 보고싶어지기도 하고, 밤꽃이 일찍 피면 주변의 젊은 남녀들이 왠지 수상해 보이는 때도 있습니다. 샘이 나서 그런 게 아니라 나도 무슨 축제 속에 끼어든 느낌이라 얼떨결에 가슴이 달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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