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공포' 같이 나누며 가족애 · 공동체의식 커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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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 사는 스테이시 스테이플턴(31)은 최근 남편 폴과 아이를 갖기로 합의했다. 결혼한 후 5년여 동안 경제적 부담 때문에 출산을 미뤄왔으나 9.11테러 참사를 겪고 마음을 고쳐먹게 된 것이다.

스테이시는 "남편, 그리고 자녀와 함께 하는 가족이야말로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란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했다. 뉴욕대 메디컬센터의 마이클 실버스타인 박사는 "9.11테러가 종족보호 본능을 자극, 베이비 붐을 일으킬 것"이라고 진단했다.

스테이플턴 부부의 예에서 보듯 9.11 참사는 미국인들의 가치관과 생활양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참사 직후 미국인들이 보였던 최초의 반응은 극도의 공포였다. 자유의 땅으로 믿어졌던 미국이 갑작스레 공포의 땅으로 변하고 2차 테러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미국인들은 당장 생활 반경을 좁혔다.

극장이나 운동경기장과 같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기피 대상이 됐다. 대신 사람들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갑작스레 실내장식 소품과 가구 등 가정용품의 매상이 높아졌다. 영화관 업주들은 울상을 지었지만 비디오 대여점 업주는 늘어나는 손님으로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이밖에도 미국인 5명 가운데 1명이 수면장애에 시달린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비행기를 이용한 해외여행자는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때마침 탄저균 소동이 터지면서 방독면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이같은 공포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났다. 스테이플턴 부부와 같은 기혼자들의 출산 붐이나 독신 젊은이들의 결혼 선호 현상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족을 울타리삼아 해결하려는 현상이다. 갈라서기 일보 직전의 부부들도 이혼을 보류하거나 취소하는 사례들이 많아졌다. 종교에 귀의, 심리적 안정을 찾으려는 경향도 뚜렷해져 교회를 찾는 발길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개인주의에 매몰돼 있던 미국인들은 '공포'라고 하는 공동의 감정을 공유하면서 공동체 의식을 높여 갔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9.11테러 이후 10명 중 6명이 자선단체에 기부금을 냈거나 헌혈을 했거나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표현을 빌리면 테러 현장 뉴욕은 '비정한 거대도시'에서 '인정 넘치는 마을'로 변해갔다. 보이지 않는 적의 위협에 대비하는 최선의 길은 개개인이 함께 힘을 모으는 것임을 미국인들이 깨닫게 된 것이다.

뉴스위크는 "9.11테러 이후 미국인들의 변화는 60년 전 진주만 공습 때 나타났던 현상과 비슷하다"고 분석하면서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렸던 지난 10년간 미국인들이 탐닉했던 방종을 깨끗이 씻어주는 청정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같은 희망어린 분석과는 반대의 경향도 보인다. 타임 온라인판은 미국의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 하룻밤 파트너와 관계를 맺고 헤어지는 '테러 섹스'로 공포감을 극복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내일 당장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장기적인 인생 계획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풍조도 그 틈에서 일어나고 있다.

뉴욕=신중돈 특파원, 서울=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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