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카불의 보통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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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폴커 한트로이크(Volker Handloik)'.

카불에서 타지키스탄 수도 두샨베로 가는 러시아 비상사태부 소속 M-26 헬기는 눈덮인 힌두쿠시 산맥을 넘고 있었다. 취재수첩을 펼쳤더니 한트로이크가 손수 적어준 이름과 연락처가 눈에 들어왔다.

독일 주간지 슈테른의 기자였던 그는 지난달 중순 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 북부동맹군의 탱크를 타고 취재를 하던 중 탈레반 패잔병들이 쏜 총에 맞아 마흔살로 생을 마감했다. 독일어.영어.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10여년간 체첸 등 여러 전쟁터를 누벼온 노련한 종군기자였다.

두달 전 두샨베에 있는 북부동맹 대사관에서 아프가니스탄 지도를 펼쳐놓고 진입 경로를 구상하던 그와 처음 만났다. 일주일에 한번 꼴로 뜨는 아프가니스탄행 헬기의 차례를 기다리던 기자에게 그는 중고차를 함께 구입해 국경을 넘자고 제안했다.

다음날 우리는 국경 통과가 가능한 특수차량 번호판이 달린 4륜구동 중고차를 발견했다. 하지만 타지키스탄에선 해외송금을 받을 길이 없어 이런 저런 방법을 물색하며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인편으로 먼저 돈을 받은 그는 "편집국장의 지시로 황급히 떠나게 됐다"는 말을 남기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났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무엇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이곳을 찾으려 했던 것일까.

10여일 동안 카불에 머물며 아프가니스탄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수염이 짧다고 사람들을 매질하던 탈레반 정권이 사라진 것은 기뻐했지만 9년 전 세력 쟁탈전을 벌이며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던 북부동맹의 군벌들이 다시 권력을 쥔 것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군벌과 주변 국가의 욕심, 종교로 포장된 강압 통치, 그리고 열강의 독단.독선 모두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침묵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작전명인 '불굴의 자유'나 '무한 정의'는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비극은 계속될 것이다. 이번 취재의 결론이다. 한트로이크, 그는 이 결론에 동의할까. 두려운 마음으로 그의 명복을 빈다.

이상언 순회 특파원 두샨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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