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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2년 비록 북핵 2차 위기] 10.<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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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 지난 4월 16일 방한한 딕 체니 미국 부통령(왼쪽에서 둘째)이 서울 용산의 미8군 기지에 도착해 오른손에 연설문을 들고 연설장으로 향하고 있다. 체니 부통령은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블룸버그 제공]

2004년 1월 8일. 북한 외무성 초청을 받은 미국 민간 방북단이 평안북도 영변의 핵시설 참관에 나섰다. 방북단은 핵 물리학자인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 잭 프리처드 전 대북 교섭담당 대사 등 5명. 북한이 2002년 12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원을 추방한 이래 외부에 핵 시설을 공개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들이 핵 재처리 시설인 방사화학실험실에 들어섰을 때 북한은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과 관련된 핵물질을 보여준 것이다.

헤커 박사의 증언. "시설은 잘 정비돼 있었습니다. 북한 과학자들도 기술적인 질문에 능숙하게 대답했지요. 우리는 이 시설을 둘러본 뒤 '당신들이 보여준 것은 장비뿐이다. 플루토늄은 얼마나 추출했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두 개의 유리병이 든 붉은 금속상자를 갖고 왔어요. 그들은 병에는 플루토늄 옥살산분말 150g과 플루토늄 금속 200g이 각각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옥살산분말은 플루토늄 금속 추출 전에 만들어진다). 그러나 당시 그것을 플루토늄으로 단정할 수는 없었어요. 간단한 테스트만 하면 금세 알 수 있었는데 그것까진 하지 못했습니다."

이날 6시간45분 동안 핵시설을 둘러본 헤커 박사는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과 별도로 만났다.

"평양은 핵 억제력을 가졌습니다. 이번 방문이 당신에게 우리의 핵 억제력 보유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겠지요."(김계관)

"이번에 본 것만으론 그렇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핵 억제력은 적어도 세 개로 구성됩니다. 첫째 플루토늄을 만들 능력, 둘째 핵무기 장치를 설계하고 만들 능력, 셋째 핵무기 장치를 운반체(미사일)로 통합할 능력입니다. 우리가 본 것은 플루토늄을 만들 능력을 가졌다는 것뿐입니다."(헤커)

헤커 박사는 김 부상에게 일침도 가했다. "핵 억제(Nuclear Deterrence)란 말은 거의 동등하게 핵 무장한 과거 미.소 간에 작동한 것입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핵 억제력 개념은 미.북 간에는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북한은 이후 '핵 억제력' 대신 '자위적 억제력'이란 표현을 한동안 쓰다가 최근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면담 도중 김계관은 초조한 모습도 보였다고 한다. 헤커 박사의 이어지는 설명.

"김 부상은 '당신이 미국에 돌아가 북한이 핵무기를 이미 보유했다고 얘기한다면 미 정부는 (군사적) 조치를 취할 것으로 보는가' '우리는 미 정부가 당신이 내린 결론을 대북 공격의 구실로 이용하는 것을 우려한다'고도 했지요."

◆ 실체가 안 잡힌 북의 핵 재처리 규모=북한의 핵 시설.물질 공개는 협상력을 올리기 위한 것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북한은 전모를 보여주지 않았다.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미국의 정보력을 시험대에 올리는 것이기도 했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잘못된 정보로 홍역을 치른 미 정보 당국에 북핵 능력 파악은 또 다른 두통거리였다. 정부 관계자 A씨의 얘기.

"북한은 2003년 1~6월 8000개의 '사용후 핵연료봉'을 모두 재처리했다고 했지요. 하지만 정부는 북한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으로 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예요. 북한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관찰 결과와 다르니 한.미 양국 모두 기가 막히는 일이죠."

정보 소식통 B씨의 설명. "지금까지 재처리 징후가 포착된 것은 세 번이었어요. 2003년 4월 30일, 5월 1일, 7월 29일 방사화학실험실 냉각탑에서 수증기가 나오는 것이 미국 인공위성에 잡혔습니다. 주목되는 것은 북한이 재처리를 끝냈다고 한 이후인 7월 29일 수증기가 포착된 점이에요. 북한이 재처리한 개수는 2000~3000개라는 것이 한.미 양국의 대체적 분석입니다. 다만 미 중앙정보국(CIA) 쪽에선 재처리를 다했다는 주장도 나오는 것으로 압니다."

2004년 1월 12일. 북한은 '핵 동결 대 보상'이라는 새 제안을 들고나왔다. 2차 6자회담의 초점을 그쪽에 맞추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참가국 간 셔틀 외교가 시작됐다. 파기스탄과 북한 간 핵.미사일 거래 커넥션이 공개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2월 2일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 대부인 압둘 카디르 칸 박사는 "우라늄 농축을 위한 재료, 디자인 및 기술이 북한으로 이전됐으며, 그 기술은 1980년대 후반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후 "평양 방문 때 지하시설에서 완전히 조립된 형태의 핵폭발 장치 3기를 목격했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북한의 플루토늄-우라늄 핵개발 능력 공개는 6자회담의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이라크 전후 처리 문제에 허덕이던 미국이 어떻게든 다자구도로 짐을 덜려 했기 때문이다.

2월 25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2차 6자회담이 개막됐다. 참가국 수석대표는 북한만 바뀌었다. 외무성 내 아시아통인 김영일 부상 대신 미국통인 김계관 부상이 나왔다. 회담은 순항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미국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북한 핵 폐기'(CVID)와 북한이 내세운 '핵 동결 대 보상' 원칙은 양립할 수 없었다. 그래서 회담 결과물을 내는 과정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미국에선 딕 체니 부통령이 개입했다. 다음은 회담 소식통 C씨의 설명과 미국 언론 보도를 통해 재구성한 당시 상황.

◆ "미 강경파 '동결' 용어에 알레르기 반응"=참가국 간에 공동 언론발표문 조율이 27일 시작됐다. 당초 미측 대표단에 떨어진 훈령은 '발표문에 CVID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반대로 협상이 벽에 부닥치자 수석대표인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가 이를 본국에 보고하고 훈령을 기다린다. 이때 체니가 'CVID가 성명에 들어가지 않으면 회담이 위험에 빠질 것'이라고 지시한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공식 행사참석차 자리를 비웠을 때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설득한 것이었다. 전달 채널도 국무부 라인이 아닌 마이클 그린 백악관 선임보좌관을 통해서였다. 파월이 이를 안 것은 28일이었다.

파월은 당시 리자오싱(李肇星) 중국 외교부장 등에게서 회담 지속을 요구하는 전화를 받는다.

파월은 바로 부시와 따로 만나 그린 보좌관이 보낸 훈령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고, 부시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CVID란 표현이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번엔 북한이 거부했다. 발표문 초안 3항에 '회담을 통해 참가국들은 상호 입장에 대한 이해를 증진했다'는 구절이 미국의 CVID 원칙에 북한이 동의한 것으로 해석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가국 모두가 합의한 형태의 공동 언론발표문은 채택되지 못하고, 그보다 격이 떨어지는 의장 성명이 나왔다. 회담 소식통 D씨의 설명.

"부시 행정부는 북핵을 동결만 시킨 클린턴 정부 때의 북.미 제네바합의(94년)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봤어요. 이에 대한 비판이 곧 부시 행정부 대북 정책의 출발점이라고 보면 됩니다. 특히 미 강경파들은 우리가 '동결(Freeze)'이라는 용어를 쓰는 데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습니다. 북한이 당시 공동 언론발표문을 수용하지 않은 것은 미국 내 움직임을 눈치챘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2차 6회담을 전후로 해 체니 부통령이 전면에 나선 점은 주목거리다. 그는 4월 10~16일 한.중.일 순방에 나서 북핵과 관련한 메시지를 직접 전한다. "북한이 핵실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6자회담이 빨리 성과를 내야 합니다."

그의 발언은 11월의 미 대선에서 북핵 문제가 부시 대통령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하겠다는 인상도 풍겼다. 북핵 문제와 체니의 역할에 대해 부시 정부의 전직 고위 정보관계자가 본지에 밝힌 내용은 음미할 만하다.

"부시 행정부의 외교안보 문제는 체니 부통령에게 전권이 위임된 상태입니다. 그런 만큼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선 체니 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 회담이 필요합니다. 이 자리에서 미국이 원하는 바를 북한이 받든지 말든지 해야 합니다. 한국도 체니 부통령을 직접 설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논리는 북한을 달래자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 돼야 합니다. 그래야 미국이 따라올 수 있습니다."

미국은 3차 6자회담(6월 23~26일)에서 처음으로 포괄적 북핵 협상안을 내놓는다. 한국 정부와 머리를 맞대고 낸 안이었다. <본지 7월 12일자 1, 5면> 그러나 6자회담은 여전히 교착상태에 빠져 있고,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과감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핵무기를 개발한 제1의 핵 강국 미국, 두 번째로 핵 개발을 하고 미국에 필적하는 핵 능력을 보유한 러시아, 자력으로 핵 개발을 한 중국, 미국의 핵우산에 들어간 세계 유일의 피폭국 일본, 미국에 의해 핵 개발이 좌절된 한국, 미국을 빌미로 뒤늦게 핵 개발에 나선 북한이 벌이는 6자 핵게임의 끝은 무엇일까. 이제 그 대단원의 막이 오르려 하고 있다.

오영환 기자, 정용수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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