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세상보기] 에이즈 퇴치할 '지놈 상황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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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올해는 1981년 '후천성 면역결핍질환'이라는 병을 의미하는 에이즈가 처음으로 알려진 지 20년째 되는 해다. 많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에이즈는 다른 감염성 질환과 비교해 과학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역사적으로도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있다.

에이즈는 생물의학사에 유래없이 단기간에 집중적인 연구가 수행됐던 질환이다. 81년 미국에서 질환이 처음으로 보고 된 이후 불과 2년 만에 그 원인체가 HIV라는 바이러스임을 알아냈고, 그로부터 2년 후에는 HIV 지놈 전체가 밝혀졌다.

사실상 첫 치료제인 AZT는 87년부터 공식 판매되기 시작했다. 1백여가지가 넘는 정교하게 조작된 재조합단백질, 항체, 백신 등이 에이즈 하나를 위해 개발됐다. 지극히 일부만이 상용화됐고 대부분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으나 신약개발 전반에 대하여는 현대과학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집중적인 연구에도 불구하고 에이즈와 HIV의 생물학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다. HIV는 성접촉이나 수혈 등을 통해 인체에 감염된 후 여러 종류의 세포에 침투해 들어간다. 이 세포들은 대부분 면역기능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들인데 이에는 인간의 면역전선에서 '최고 지휘부'역할을 하는 TH 세포가 포함돼 있다.

이 바이러스는 자신의 지놈을 인간의 지놈과 같은 형태로 바꾸고는 그것을 인간 염색체(지놈)에 끼워 넣어 버젓이 인간 유전자들과 같은 행세를 하는 것이다. 에이즈에서 면역결핍은 TH 세포의 숫자가 감소되기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하지만 지금도 이 세포들이 어떻게 죽느냐에 관해서는 많은 이견들이 있다. 한마디로'고정간첩'이 우리의 방어망을 서서히 붕괴시키지만 잡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에이즈처럼 정치적인 질환도 근세사에는 별로 없었다. 에이즈 연구에 예산이 많이 책정되고 임상시험이 급속도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환자그룹과 동성애 단체들의 조직적인 로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HIV 발견과정에서는 미국 갈로 박사의 석연치 않은 행동 때문에 프랑스 몽타니에 박사그룹과 누가 진짜 발견자인지에 대한 치열한 법정공방이 있었는데 최종적으로는 양국의 대통령들까지 나서서 조정을 해야 했다.

최근에는 치료제 때문에 아프리카 국가들이 거세게 반발해 정치 쟁점화되고 있다. 치료제를 개발한 선진국 회사들이 가격을 높게 책정해 아프리카 같은 빈곤국에서는 사용할 엄두가 안 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85년 에이즈 환자가 첫 보고된 이래 지금까지 총 1천5백여명이 감염됐고 이중 1천2백여명 정도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공식 집계돼 있다.

우리나라의 감염자 수는 적기 때문에 모든 감염자들의 HIV 유전정보를 분리하여 분자수준에서 정확히 모니터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적은 예산을 이용해 세계 최초로 국가의 모든 에이즈 바이러스에 대해 '지놈 상황판'을 만들어 운영한다면 감염성 질환 관리체계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면 감염 경로를 정확히 추적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우리에게 맞는 백신, 진단제를 개발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김선영 서울대 교수 · 유전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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