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8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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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실로 오랜만에 단둘이 앉아 있음이었다.

2년 전이었던가.

김양이 중원소경의 대윤으로 전임되어갈 때 찾아와 송별인사를 짧게 나누고 헤어진 것이 마지막이었던 것이었다. 그때 김흔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위흔이 네가 중원소경의 대윤으로 가다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그러나 김양은 그렇게 생각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간신히 중원소경의 대윤으로 가고 있을 때 사촌형 김흔은 이미 강주의 대도독이었던 것이다. 김양은 김흔이 건네주는 술잔을 받아 마시면서 생각하였다.

내가 이제 무진의 도독으로 간다 하더라도 사촌형 태흔(泰昕)은 이미 상국(相國)이 아닐 것이냐. 상국이라면 나라의 재상을 의미하는 벼슬. 그뿐인가. 자신은 진골에서 6등품으로 강등되었으나 사촌형 태흔은 이찬으로 완전히 진골 중에서도 특급귀족으로 복권되어 있음이 아닐 것인가.

이찬이라면 신라17관등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등급. 이는 왕의 친족들이나 할 수 있는 이벌찬의 바로 아래 등급으로 최고의 계급을 가리키고 있는 특급귀족인 것이었다. 6등품과 이찬은 하늘과 땅의 천양지차(天壤之差)인 것이다.

"태흔 형이야말로 신색이 좋소이다."

김흔의 자는 태. 비록 나이 차이가 5년이 되고, 종부 형이어서 항렬이 높지만 두 사람은 서로 호형호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색이야 좋겠지. 나야말로 요즘 비육지탄(脾肉之嘆)일터이니까."

김흔은 아우 김양을 보자 절로 흥이 난 듯 연신 술잔을 건네면서 웃으며 말하였다.

"한 때는 위흔이도 알다시피 항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말을 타고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넙적다리에 군살이 붙을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곳 왕도에 앉아서 허송세월을 하고 있으니 요즘이야말로 비리육생(脾裏肉生)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김흔이 말하였듯 '비육지탄'과 '비리육생'은 다 같이 넙적다리에 군살이 붙는다는 뜻으로 『삼국지』의 주인공 유비가 할 일 없이 허송세월을 보내다 울면서 한탄할 때 사용했던 말인 것이다.

실제로 김흔은 못보던 사이에 살이 쪄 있었고, 길게 수염까지 기르고 있었다.김흔은 어느덧 27살로 장년의 나이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내가 넙적다리에 군살이 붙어 있다면 위흔이는 어떠하냐. 넙적 다리에 오히려 근육이 붙고 있겠구나."

김흔의 말에 김양이 대답하였다.

"태흔이 형도 잘 알고 있지 않소이까. 옛말에 이르기를 '조그만 구멍에 잠긴 물에서는 잔을 띄울 수 없고,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곳에서는 뜻하는 바를 얻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김양의 말은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로 '배수(盃水)', 즉 작은 그릇에 잠긴 물에서는 잔을 띄울 수 없고, '오목한 요당'에서는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 말을 듣자 김흔은 갑자기 생각이 난다는 듯 자신의 무릎을 내리치면서 말하였다.

"뭘 그리 한탄하고 있느냐. 위흔이 너야말로 세명의 계집(女)을 통해 천하를 얻을 수 있는 타고난 운명이 아니더냐. 그러니 '조그만 그릇에 담긴 물'이면 어떠하고, '오목한 곳에 갇혀있다'하더라도 어떠하겠느냐. 너는 하늘로부터 여색을 통해 천하를 얻을 수 있는 팔자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렇게 말하고 나서 김흔은 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에 비하면 나야 세개의 풀잎(艸)으로 간신히 목숨을 연명해 나갈 운명이 아닐 것이냐."

그러자 김양도 생각이 난 듯 덩달아 박장대소하였다.

수수께끼의 말.

김양의 운명이 '세명의 계집을 통해 천하를 얻을 수 있음'이며, 김흔의 운명이 '세개의 풀잎으로 간신히 목숨을 연명해 나갈 수 있음'이라는 말은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수수께끼의 진언(眞言)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실제로 김흔은 세개의 풀잎을 통해 성(聖)을 이루었고, 김양은 세 명의 계집을 통해 세(世)를 이루었던 특이한 생애를 보냈던 것이다. 거기에는 두 형제만의 독특한 유래가 있었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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