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이명자 '방황하는 편지' 중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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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밤마다 나는 편지를 쓴다.

새벽이 오면 나의 편지는

조금씩 지워지면서 떠나고

나는 지워지는 편지의 뒷덜미에

나의 숨결을 하나씩 뽑아 던진다.

이윽고 호흡곤란 증세에 시달려

나의 편지는 천천히 중단된다.

중단될수록 거세지는 침묵의 속력을

너는 모르리라,너의 눈썹을 강타하는

그 폭풍의 종이에 썼다 지운 침묵의

-이명자 (1947~)'방황하는 편지'중에서

누구는 그대가 미국 갔다고 하고 누구는 시골에서 산다고 하더니…. 골목 안, 작명소 집 앞을 지나 1970년대 문학사상사 편집실, 삐걱거리는 이층 계단 올라가면 넓은 앞니 내놓고 수줍게 웃으며 큰 키를 코스모스처럼 흔들던 명자씨. 그때 안고 있던 것이 폭풍이었던가. 십년도 넘은 지난날,종이 비행기처럼 날려 보내준 시집 『별제(別祭)』를 다시 펼치니 쓰다가 지운 자리의 초고속 침묵이 이마를 강타하네.

김화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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