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8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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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김양이 취할 최선의 비책,기화가거(奇貨可居). 이는 지금은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훗날 자신에게 큰 이득을 줄 인물이라고 판단하여 그 인물에게 미리 투자를 해놓는 일을 뜻한다.

이는 『사기』의 '여불위전(呂不韋傳)'에 나오는 고사로 전국시대 말엽 조(趙)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은 나라가 쇠퇴해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러나라의 사람들이 오고가는 번화한 도시였는데, 이 도시에 자주 들렀던 한(韓)나라의 호상(豪商)인 여불위의 뛰어난 계산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최고의 이익은 바로 사람'이라는 뛰어난 상술을 가졌던 여불위는 어느날 진(秦)나라의 태자 안국군(安國君)의 서자인 자초(子楚)가 인질로 잡혀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진나라는 조나라를 자주 침범했기 때문에 자초는 그곳에서 몹시 괄시를 받아 어려움에 처해있었던 것이었다.

여불위는 자초를 보고 투자해둘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초에게 잘 투자해 놓으면 먼 훗날 자신에게 큰 이득이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여불위는 곧 자초의 초라한 거처로 찾아가 그에게 도움을 줄 뜻을 보였다. 스스로를 홀대받고 있는 인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자초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이에 여불위는 이렇게 말을 하였다.

"소양왕(昭襄王)은 이미 연로하니 오래잖아 곧 당신의 아버지인 안국군께서 진왕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정비인 화양부인(華陽夫人)께오서는 아들이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당신까지 합해 20여명이 넘는 서자들 가운데 누구를 태자로 택하시겠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당신은 이곳에서 인질로 잡혀있는 이상 유리한 입장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와서 그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 아닙니까."

자초는 탄식을 하며 말하였다. 그러자 여불위는 눈을 빛내며 자초에게 자신이 얼마든지 돈을 대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것으로 화양부인의 환심을 살 선물을 사 보내는 한편 널리 인재를 모으라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여불위는 직접 진나라로 가서 자초를 태자로 삼도록 힘을 써보겠다는 이야기였다. 자초는 그제서야 여불위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는 손을 잡으며 말했다.

"만약 당신 말대로만 된다면 그 때는 함께 진나라를 다스리도록 합시다."

과연 여불위의 재력과 모사로 자초는 마침내 태자로 책봉되었고, 이후 여불위의 계획대로 드디어 자초는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가 바로 장양왕(莊襄王)이었고,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약속대로 여불위를 정승으로 삼았으며, 마침내 훗날 시황제로 천하를 통일하였던 태자 정(政)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왕으로부터 아버지 즉 중부(仲父)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천하의 권력과 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여불위가 진귀한 보물 즉 기화(奇貨)였던 자초를 발견하고, 그를 비싸게 사두고, 그에게 투자해 두었던 '기화가거'의 비책 때문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두운 거리를 걸어가면서 김양은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나는 김균정과 김우징의 부자를 귀한 보물로 만들 것이며 그 두 사람을 비싼 값으로 사 미리 투자해 놓을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두 사람 중 한사람을 반드시 왕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나는 여불위처럼 정승이 되어 천하의 권세와 영화를 함께 누릴 수 있게 될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멸문되었던 가문의 광영을 되찾고 경주로 금의환향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때였다.

가까운 곳에서 댕댕댕 - 하고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분황사(芬皇寺)에서 들려오는 범종소리였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 서력으로는 634년에 건립된 사찰로 특히 원효대사가 이 절에 머물면서 수많은 저서를 저술한 곳으로 유명하였다. 원효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설총(薛聰)이 원효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만들어 안치해 두었는데, 김양은 실제로 그 소상을 본적이 있었다.

소상의 모습은 특이하게도 원효가 앉은 자세에서 머리를 돌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들 설총이 절을 하자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는 전설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종소리는 건시(乾時)를 알리고 있었다. 건시 다음 시간인 해시(亥時)부터는 성 안에서 통행금지가 시작되고 있었으므로 김양은 분황사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판적택(板積宅)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판적택은 경주에 있는 35개의 금입택(金入宅)중의 하나였는데, 그 집에는 그의 종부형(從父兄)인 김흔(金昕)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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