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세상보기] 신기술도 과학적이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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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요즈음 무세제 세탁기가 화제인 모양이다. 무분별한 세제의 남용으로 수질 오염이 심각하던 터에 우리 정부에서도 NT 마크로 그 가치를 인정해준 세계 최초의 기술이라고 하니 우선은 축하할 일이다.

모직이나 실크같은 약한 옷감의 경우에는 휘발성 유기 용매로 때를 녹여내는 드라이 클리닝을 하지만, 역시 빨래는 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양한 물질을 녹이는 화학적 특성을 지닌 맹물에 빨래를 담가두기만 해도 때가 잘 빠진다. 주무르거나, 비틀어서 짜거나, 두드리거나 또는 더운 물을 쓰면 더욱 좋다.

물론 화학의 힘을 이용하면 빨래가 더 쉬워진다. 나무를 태운 재를 우려낸 잿물은 염기성이기 때문에 때가 쉽게 녹아 나온다. 오래된 소변이나 소다회 또는 양잿물이나 식초를 넣으면 빨래가 잘 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비누나 합성세제는 오염 물질을 둘러싸서 강제로 떼어내기 때문에 그 효과가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예전엔 먹기에도 부족했던 동물성 지방이나 식물성 기름으로 만들어야 하는 비누는 귀해서 아무나 쓸 수가 없었다.

비누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790년 이후였고, 합성세제는 1930년대에 개발됐다. 우리나라에 비누와 합성세제가 대량으로 보급된 것도 각기 50년대와 60년대 말부터였다.

비누와 합성세제가 값싸게 보급되면서 누구나 깨끗한 옷을 입는 즐거움을 누리게 됐다. 그러나 옛날의 맹물 빨래법을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들이 세제를 마구 쓰면서 환경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그렇다고 다시 더러운 옷을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무엇인가 대책이 필요하다.

일본에서 개발했다는 무세제 세탁기는 그 원리가 명백하다. 음파와 같은 압력파이지만 우리 귀로는 들을 수 없는 20㎑ 이상의 초음파를 이용한 이 세탁기는 안경점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쓰던 세척기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우리의 무세제 세탁기는 도무지 그 작동 원리를 알 수가 없다. 광고를 보면 세탁기의 기계적 성능보다는 세탁수가 핵심인 모양이다. 탄산나트륨(소다회)을 전해질로 써서 전기분해한 물을 이용한다면 화학적으로는 소다회나 가성소다를 녹인 것과 마찬가지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굳이 복잡한 장치를 쓸 필요도 없고, 신기술이라고 자랑할 이유도 없다.

정부에서도 인증을 해주었다니 다른 무슨 비밀이 숨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당치도 않은 '양전자'와 '플라즈마'를 거론하는 개발자의 설명은 오히려 의혹만 키울 뿐이다. 진짜 신기술과 엉터리 기술의 차이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

똑같은 회사가 엉터리 육각수 냉장고로 우리를 우롱했던 적도 있으니 말이다. TV를 통한 실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러 요인으로 결정되는 세탁기의 성능을 엉성하게 비교하는 대신 신비하다는 물의 정체를 밝혔어야 한다.

세계 최초와 환경 친화적이라는 미사여구만으로 신기술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세탁기를 만드는 기술은 보호돼야 하지만,신비하다는 세탁수의 정체는 비밀일 수가 없다. 정부도 무엇을 근거로 NT 마크를 주었는지 확실하게 밝혀야 할 책임이 있다. 근거도 밝히지 못하는 '신기술'을 마구 인증해 주어서는 안 된다.

李悳煥(서강대교수 ·이론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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