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 미, 세계경제 구원투수 되려면 F학점 재정적자부터 해결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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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지난주 미국 경제는 두 장의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하나는 무역수지, 다른 하나는 재정수지였다. 둘 다 빨간색이었다. 그것도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쌍둥이 적자’였다.

그러나 색은 같아도 숫자가 함축하는 의미는 전혀 달랐다. 하나는 희망을, 다른 하나는 근심을 담았다.

3월 미국 무역수지는 404억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15개월 만에 최대치다. 더욱이 2개월 연속 적자규모가 늘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반색했다. 적자 내역을 뜯어보니 자본재 수입이 확 늘었기 때문이다. 수입 증가분 56억 달러 중 64%가 자본재 수입 증가에서 비롯됐다. 미국 기업이 투자를 재개했다는 분명한 신호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유럽 재정위기 타개에 적극 개입하고 나선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이제 막 온기가 돌기 시작한 미국 경기에 유럽 재정위기가 찬물을 끼얹을까 우려해서다. 오바마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물론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스페인 총리에게 직접 전화해 1조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2008년 금융위기의 진원지로 체면을 구긴 미국으로선 오랜만에 구원투수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그러나 다른 한 장의 성적표는 불편한 진실을 일깨운다. 4월 미국의 재정적자는 826억9000만 달러. 지난해 같은 달의 네 배이고, 4월 적자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19개월 연속 적자행진이란 기록도 세웠다. 400억 달러 정도를 예상한 월가의 예상치도 훨씬 웃돈 것이다.

더욱이 4월은 미국 국민이 개인 소득세를 신고·납부하는 달이다. 이 때문에 대개 4월엔 흑자가 나온다. 과거 56년 동안 4월에 적자를 낸 건 13번뿐이다. 게다가 올 4월 개인 소득세 수입은 지난해보다 8.5% 줄었다. 경제가 성장하면 세수는 늘어야 정상이지만, 오히려 뒷걸음질친 것이다. 올해 재정적자는 지난해 1조4000억 달러에서 1000억 달러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결국 재정적자 성적표는 미국도 남유럽이 겪고 있는 재정위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그리스는 자국 통화가 없기 때문에 1차로 매를 맞았을 뿐이다. 미국이 기축통화 달러를 찍어내는 나라이긴 하지만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달러 가치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 역시 재정위기의 먹구름은 비켜갈 수 없는 셈이다. 이는 수치로도 입증된다. 뉴욕 타임스(NYT)에 따르면 미국의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의 140%다. 그리스는 이 비중이 115%다.

미국이 세계 경제의 구원투수로 확실히 복귀하자면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안 된다. 남유럽엔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압박하면서 스스로는 재정적자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달러 지위는 추락할 수밖에 없다. 피터 오재그 백악관 예산국장이 이날 로이터 인사이더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그리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의회가 신속히 재정적자를 줄이는 쪽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촉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 정가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다. 세금 올리고 복지혜택을 깎겠다는 데 반길 유권자는 드물다. 그러나 세계 경제 구원투수로서 미국의 입지는 이 개혁의 성과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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