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분수대] 문민과 제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올 봄 국내에서도 개봉된 영화 'D-13'(원제 Thirteen Days)은 1962년 쿠바 핵미사일 위기를 맞은 케네디 미 대통령과 보좌관들의 활약을 그렸다.

군부의 강경파는 핵위기를 소련과의 전면전도 불사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려 하고,케네디는 온건파 입장에서 원만한 사태 수습에 부심한다. 케네디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보좌관(케빈 코스트너 扮)이 일선 공군기지의 조종사에게 직접 전화까지 걸어가며 사태확산을 막는 등 미.소 양국의 정치게임이 실화를 바탕으로 생생히 묘사됐다.

이 영화에서 케네디는 평화주의자이자 문민(文民)권력의 이상형처럼 묘사됐다. 그러나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가 명명한 '제왕적 대통령직(imperial presidency)'에서는 케네디도 예외가 되지 못한다.

제왕적 대통령은 헌법규정 이상으로 과도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대통령이다. 미 대통령의 권력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래 지속적으로 강화돼 케네디.존슨.닉슨 시절에 절정기를 맞았다. 루스벨트는 외국과 행정협정을 맺으면서 한번도 상원의 자문과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케네디는 베트남 내전에 개입했고, 쿠바 피그즈만을 침공하다 망신당했다. 존슨은 선전포고에 대한 의회의 동의도 받지 않고 미국을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깊이 빠뜨렸다. 닉슨은 캄보디아를 비밀리에 멋대로 폭격했다.

이들의 권력 과용은 루스벨트의 뉴딜처럼 강력한 사회복지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으므로 제3세계의 적색.백색 독재와는 거리가 있다.

어떻든 70년대 전반 닉슨 대통령 때 터진 워터게이트 사건은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에 일대 경종을 울려주었다. 미 의회가 통과시킨 전쟁권한법(73년).예산통제법(74년) 등은 무소불위의 대통령을 제도로 견제해야 한다는 자각의 결실이었다.

우리 정치권에서도 올 들어 '제왕적 대통령'이니 '제왕적 야당총재'니 하는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그제는 한나라당이 주최한 '제왕적 대통령 해소방안' 토론회도 열렸다. 토론자들이 "제왕적 통치구조 개선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군사독재에서 벗어나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를 차례로 겪고 있지만, 권력행사의 기본 모양새는 구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일 것이다.이 문제는 내년 대선에서도 중요한 논란거리로 등장할 게 틀림없어 보인다.

노재현 정치부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