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전망대] 실업 빚 자살… 홍콩이 추워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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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올해 쉰여덟인 라우(劉)선생은 지난 14일 아파트 베란다 위에 섰다. 식구들은 그가 평소처럼 바람을 쐬며 담배 피우려는 줄 알았다. 하늘만, 그리고 구름만 쳐다보다가 그는 훌쩍 난간을 넘었다. 기겁해 달려간 식구들은 하늘 품에 안겨 있는 가장(家長)을 넋잃고 바라볼 뿐이었다.

劉선생은 1997년까지만 해도 '잘 나가는' 홍콩의 실내 장식업자였다. 집값은 하루가 다르게 뛰고, 그를 찾는 발길도 분주했다. 한달에 10만 홍콩달러(약 1천6백만원)를 벌었다고 자랑하던 시절이었다. 기세를 몰아 그는 은행돈 7백만 홍콩달러(약 11억5천만원)를 빌려 8백만 홍콩달러(약 13억원)짜리 저택을 구입했다. 새 집으로 이사가던 날 劉선생은 식구들과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러나 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집값은 반토막이 났다. 실내장식을 하겠다는 고객의 발길도 뚝 끊겼다. 결국 그는 4백만 홍콩달러(약 6억6천만원)의 은행빚을 진 데다 대출금 월 상환액 4만 홍콩달러(약 6백60만원)도 갚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집을 팔고 누옥(陋屋)으로 옮겨온 뒤부터 그는 말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매일 하늘만 바라보며 연기만 내뿜었다. 결국 그는 하늘과 하나가 됐다.

劉씨 같은 '빚쟁이(負資産)인생'이 홍콩에는 부지기수다. 자살 사건중 60%를 이들이 차지하고 있다.자살뿐 아니다. 불안.초조.무기력증.자괴감.충동적 도벽증.우울증 등 각종 정신질환도 심각하다.

홍콩 중원(中文)대학이 최근 실시한 건강조사에서 대상자인 성인 1천23명 중 17.6%에서 뚜렷한 정신질환이 관찰됐다. 전체 홍콩인구로 확대할 경우 약 81만4천여명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얘기다. 건강조사 대상자의 14%가 '빚쟁이 인생'이었으며 이들 중 25%가 정신질환 증세를 보였다.

지난해 5%에서 올해 초 4.3%까지 떨어졌던 실업률은 10월말 현재 5.5%로 다시 치솟았고, 앞으로가 더 문제다. 량진쑹(梁錦松.앤서니 렝)경제담당 장관은 "앞으로 실업자는 더 늘어나겠지만 정부가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야멸치게 말했다.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순간에도 홍콩내 실업자는 하루 3백명씩 늘고 있다. 요란스런 '대(對)테러 전쟁'의 다른 한쪽 지구촌에선 더 피말리는 '생존 전쟁'이 진행중인 것이다.

진세근 홍콩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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