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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국정원의 적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트루먼 대통령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창설한 1947년 이후 국제정치의 역사는 중앙정보국의 비밀공작의 역사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비밀공작을 맡은 정책조정실의 최초의 역사적인 공작은 53년 이란에서 영.미계 석유회사를 국유화하려는 모사데크 정부를 축출하고 팔레비에게 권력을 넘겨 중동정치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것이다.

중남미에서는 50년대에서 90년대까지 13개국 이상에서 쿠데타를 지원 또는 주도하고, 미군을 파병하고, 지도자를 미국으로 압송했다. 쿠바를 침공했다가 실패하고(61년),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을 쿠데타로 추방하고 보수적인 피노체트 장군의 집권을 돕고(73년),이란에 무기를 밀매해 마련한 공작금으로 니카라과에서 반공적인 콘트라 세력을 도와 산디니스타 마르크스주의 정부를 전복시킨 것은 중남미판 모사데크 축출이라고 하겠다.

*** 사욕과 거리 둔 美CIA

훗날 필리핀 대통령이 된 막사이사이의 고문 자격으로 공산당 게릴라 후크 소탕을 지휘한 에드워드 랜스데일이라는 전설적인 인물도 중앙정보국에 보고하는 지휘라인에서 50년대 후반 북베트남의 호치민 정권 전복을 시도하고 남베트남의 고딘디엠 정권을 안정시키는 공작에 몰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추악한 미국인'의 모델이 되었고, 미국은 베트남전쟁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다.

헝가리 인민의 봉기(56),콩고 총리 루뭄바 암살(61년),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의 실각과 수하르토 군사독재의 등장(65년), 중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 사살(68년), 캄보디아 시아누크 국왕의 실각(70년)에서도 중앙정보국의 지문이 묻어난다. 중앙정보국의 지원으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중동의 스트롱맨으로 성장하고(80년대)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96년)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미국 정보기관의 이런 파란만장한 행적 옆에 한국의 국가정보원을 세워 놓으면 그 모습의 초라함이란 눈뜨고 보기가 민망하다.

미국의 중앙정보국 요원들은 아시아와 중남미,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그들 나름으로 생각하는 미국 국가이익과 미국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쿠데타도 일으키고 요인을 납치하고 선거부정을 저질렀다. 거기에 사리사욕은 끼어들지 않았다.

우리 국정원의 일부 간부들은 실세 정치인들의 비호에 의지해 학연과 지연을 중심으로 패거리를 만들어 하라는 정보수집.분석은 안하고 벤처기업인들 한테서 뇌물을 받아 사복(私服) 채우기에 급급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재수사를 제대로만 한다면 의혹은 바로 확인된 권력형 비리로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다.

대외적인 이미지에서 미국의 중앙정보국이 메이저 리그라면 우리 국정원은 동네야구다. 한국과 미국의 국력의 차이를 인정해도 부끄럽고 한심하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옆에 세워도 국정원은 작게만 보인다.

모사드는 유대인 학살 주범의 한사람인 아돌프 아이히만을 끝까지 추적해 이스라엘의 법정에 세우고, 72년 뮌헨 올림픽에서 11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을 암살한 아랍 게릴라 '검은 9월단'을 찾아 처단했다. 우간다로 납치된 이스라엘 여객기의 승객을 구출한 엔테베 작전은 비밀공작의 금자탑이 아닌가. 어느 국정원 간부에게서 모사드 요원들의 사명감과 소명(召命)의식을 발견할 수 있을까.

*** 손발이 썩어 가는데…

한국의 국정원도 과거에는 제법 큰일을 했다. 60년대의 동베를린 간첩사건,72년 이후락(李厚洛)정보부장의 평양 밀행(密行)과 김일성(金日成)과의 담판, 주한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 미국 의회를 상대로 로비를 벌인 70년대의 코리아 게이트는 상황판단과 방법에는 문제가 있었어도 동기만은 사리사욕이 아닌 공익을 위한 것이었다.

비리에 연루된 의혹을 받는 국정원 간부들은 사실상 국정원의 적(敵)들이다.그들 몇사람 해임하고, 형식적인 재수사를 하는 것으로는 국정원의 조직적.문화적인 부패를 막지 못한다.

손발이 썩는 병(gangrene)을 라벤더 향수로 고칠 수는 없다(헤겔). 지금이라도 배후를 철저히 밝혀 눈 딱 감고 썩어가는 손발을 잘라내야 국정원이 산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 아니고는 그 일을 할 사람이 없는 게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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