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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만훈 부장 22년만에 '자대' 탐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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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1면

그곳은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가장 한창 때의 내 육신과 영혼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머물렀던 곳-. 사방 1.5㎞의 울타리에 갇힌 채 '사람들'과 동떨어진 생활을 했던 까닭에 소변을 보는 방향마저 바꾸겠다고 다짐을 했던 곳.

하지만 내게 강건함과 인내를 가르쳐주고 숱한 추억거리를 남겨준 소중한 '남자로서의 고향'이기도 한 그곳을 만 스물두해를 넘겨 다시 찾아가는 길은 설렘 그 자체였다. 이 땅에서 군인은 '제3의 인류'다.

적어도 우리 때는 그랬다."군인 몇이 사람들과 뭐뭐하고 있다"고들 하지 않았던가. 분단된 조국의 현실 탓에 전후방을 막론하고 많은 젊음들이 바로 그 삶을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

내가 '국방의 의무'란 거창한 미명(美名)의 부름을 받고 그런 삶을 보낸 곳은 강원도 원통. 군기는 세고, 교통은 편치 않던 시절 얼마나 가기 싫었으면 그랬을까마는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다'고 했던 바로 그 절규의 본고장이다.

지금으로부터 스물네해 전 논산훈련소와 병기학교를 거쳐 춘천 소양호에서 군선(軍船)을 타고 이곳에 온 것이 칠월 중순.

당시에는 원통시내(정확히는 인제군 북면 원통리였지만 다들 그렇게 불렀다)를 제외하곤 번듯한 현대식 건물 하나 제대로 없던 촌구석이었다. 그중에서도 우리 부대는 시내에서 한계령 쪽으로 늘어선 부대 중 맨 마지막 후미진 곳.

그래서 전입 첫날 밤이면 으레 고참들이 "공일이면 북한애들과 축구를 하는데 화가 나면 서로 목을 베어 간다"고 대포(?)를 놓곤 했을 정도다.

봉화산 기슭에, 주변 마을 이름도 '솔거리''둔지말''갈골' 등 시인들이나 살 법한 곳에, 호박돌로 담을 둘러치고 곳곳에 포플러가 장승처럼 선 사이로 아담한 막사들 하며, 분주하게 오가던 전우들의 모습이 아직도 영화처럼 생생하다.

헌데, 아니 이게 웬일인가. 막상 부대에 도착해보니 모든 게 변해 있는 게 아닌가. 담자락은 블록으로 높다랗고, 연못은 메워지고, 막사들도 위치를 달리해 새로 지어지고….

아하 터만 그대로구나-.이곳까지 오면서 인제의 관문인 군축령에 터널이 뚫리고,사단사령부 앞으로 신작로가 휑하니 달리는 것을 보고 대강 엄청나게 바뀌었으리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하긴 그 때가 언제인가.

"부대상황이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모두 변해 몹시 생경하실 겁니다."

부대장 유승곤(劉昇坤.39)소령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내가 근무했을 때의 잔재는 현재 창고로 쓰이고 있는 당시의 식당 건물뿐, 하다못해 식구들이 주고받는 구호까지도 '당백(當百)'대신 '충성'으로 외쳐지고 있으니….

'병기근무대'였던 부대명이 규모가 커지면서 '정비대대'로 바뀌고 전차정비.통신정비가 추가되는 등 기능면에서도 일부 변화가 있었다. 내가 '고롭개(교육계를 이르는 말로 교육뿐만 아니라 정보.작전.화학.정훈까지 커버하느라 고생이 심하다는 뜻의 자조 섞인 이름이다)'로 '뺑이치던' 행정반은 운영본부와 지휘통제실로 나뉘어 있었고, 여군장교도 한명 있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달라진 건 역시 병사들의 생활. 카키복.통일화(무좀의 주범)대신 '개구리복'.워커가 평상차림인데다 내무반에서의 자유가 우리 때는 상상도 못할 정도다. 우선 옛 관물대 대신 사물함이 있어 괜시리 속옷까지 '쫄대'를 넣어 각(角)을 잡는 강제가 없어지고 군장도 마찬가지.

그 때는 왜 그다지 졸병들을 하찮은 일로 괴롭혔는지…, 가족사진과 함께 '나의 꿈은 퓨전레스토랑 사장'이라고 적어놓은 한 병장의 사물함을 보노라니 목이 울컥 메기까지 한다.

한 구석에 있어야 할 식기대 자리엔 TV(우리는 정신교육용으로 주당 한번씩 KBS만 볼 수 있었다. 물론 뉴스는 제외고).바둑.장기에다 각종 책들이 가득하다.

"한겨울에도 졸병 혼자서 연못가에 쪼그리고 앉아 수십개씩을 닦아봐라.특히 양고기국이라도 나올라치면 손은 저려오는데 잘 닦이진 않고…, 고향생각.엄마생각에 그만 눈물.콧물이 범벅이 되기 일쑤였지."그 시절 식기닦던 얘기를 신나게 하는데 옆에 있던 유대인(柳大仁.21)이병은 "선배라고 '후라이'되게 까네" 하는 표정이다.

하기야 내가 제대한 후 태어난 아들같은 후배들이니 알 턱이 없을테다. 그러고보니 '눈물의 페치카'도 없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에 그만큼 고마운 것도 없었지만, 혹여 꺼지기라도 할라치면 즉각 '빤쓰 바람에 집합'의 원흉이기도 했던 놈이다.

당시 월동준비는 김장(지금은 다 공장김치가 제공된다).싸리베기(청소.제설 빗자루용)와 함께 페치카연료준비가 그중 으뜸이어서 황토와 분탄의 비율을 잘못 섞으면 왕왕 이같은 참사가 벌어지곤 했었다.

그러던 것이 요즘은 기름보일러가 대신하고 있으니, 원…. 어디 이뿐이랴. 부대안에 공중전화가 3곳이나 설치돼 있고 전령을 통해서나 구할 수 있었던 '사제(私製)'도 PX에서 맘대로 얻음에야.

하지만 그렇다고 후배들의 군기가 빠졌느냐 하면 오히려 우리때보다 눈빛이 더 살아있고 절도도 결코 뒤지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지 모를 지경이다. 부대를 떠나면서 내가 보름 동안이나 살았던(□) 군기교육대(입소경위는 군사비밀임)의 폐허를 둘러본 뒤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낙엽이 직각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역시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는 것을.

이만훈 전국부장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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