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중국경제 대장정] 8. 세계 유통의 실험실 상하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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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중산층 아파트가 몰려 있는 상하이(上海) 이민허루(伊敏河路). 매일 아침 이곳에선 서부활극 뺨치는 '유통전쟁'이 벌어진다.

주인공은 길 건너 6백m쯤 떨어져 있는 한국 이마트와 프랑스의 카르푸. 중국 손님을 한명이라도 자기 가게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쟁이다.

4년 전 문을 연 이마트의 김선민 지점장은 개장후 1시간쯤 지나면 이마트와 카르푸의 중간 지점에 서있는 게 일과다. 중국 손님들이 적진 카르푸에서 사들고 나오는 물건을 살피기 위해서다.

이마트에서 들고 나온 봉투보다 카르푸 봉투가 더 크거나 카르푸가 더 많이 판 물건이 눈에 띄면 즉시 그날 영업계획을 다시 짠다. 급히 물건 값을 낮추거나 전략상품을 다시 만들어내는 일에 이골이 났다.

상황은 길 건너 카르푸도 마찬가지다. 푸른 눈, 금발의 프랑스 지점장도 같은 시각 길거리에 나와 이 총성 없는 전쟁을 지휘한다.

이마트와 카르푸의 전쟁은 중국 중산층의 독특한 소비습관 때문에 시작됐다. 중국 중산층은 하루종일 다리품을 팔더라도 한푼이라도 더 싼 물건을 찾는다. 그런 손님들을 상대하자니 매일 피말리는 가격전쟁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중산층 시장만 그런 게 아니다. 전통 쇼핑거리인 화이하이루(淮海路)엔 백화점부터 재래시장, 구멍가게까지 유통교과서에 나오는 모든 상점들이 몰려 있다.

10여개의 대형 백화점 바로 옆엔 슈퍼마켓, 24시간 편의점, 옷가게, 담배가게가 나란히 붙어 있다.'양판점이 들어서면 동네 구멍가게는 망한다'는 유통상식에는 안맞는 광경이지만 상하이에선 이런 상식이 무시된다.

'더 싸게' 못지 않게 '더 비싸게' 경쟁도 치열하다. 난징시루(南京西路)에 나란히 붙어 있는 메이룽전(梅龍鎭)광장.시틱플라자.헝링(恒陵)광장 등 세 백화점은 세계 최고 브랜드만 취급한다.

원피스 한 벌에 1만위안(약 1백60만원)짜리는 예사다. 이곳에 진출한 일본 이세탄백화점은 일본에선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옷을 1백만원 이상 고가에 내걸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다. 새롭고 비싼 물건만 찾는 중국의 젊은 부유층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겨냥한 새상품 경쟁도 뜨겁다. 섭씨 34도를 웃돌던 9월 초 이들 백화점엔 털스웨터와 가죽옷이 대거 등장했고 보란 듯이 팔려나갔다.

이런 독특한 소비자를 놓고 세계 유통의 맹장들이 대거 몰려 격전을 치르는 통에 상하이는 '중국 유통시장의 실험실'로 불린다. 중국정부는 국내 유통시장을 꽁꽁 잠가놓고 대신 맛보기로 상하이 등 11개 도시만 1992년 개방했다. 처음엔 눈치를 살피던 독일 메트로, 태국 로터스 등 다국적 유통그룹들이 96년 이후 속속 상하이로 입성했다.

97년 말 3개밖에 없던 대형 할인점이 지금은 40여개로 불어났고 곧 개장할 매장만 4~5개가 더 있다. 상하이 소매점의 ㎡당 평균 인구는 1.4명. 소득수준이 10배 넘게 많은 일본 도쿄(東京.2.4명) 시내보다 인구당 소매점이 두배 가량 많다.

이런 무한경쟁 속에선 누구도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 98년 문을 열었던 일본계 양판점 자스코는 2년도 안돼 문을 닫았다. 푸둥에서 가장 큰 백화점으로 화제를 모았던 일본계 바바이반(八佰伴)백화점도 불과 5년 만에 중국측 파트너인 디이(第一)백화점에 팔렸다.

상하이에선 오늘 문을 연 업체가 내일 다른 곳에 인수돼도 이상할게 없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현지 외국기업들이 "상하이에서 살아남으면 세계시장에서 살아남는다"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전 푸단(復旦)대 교수인 선웨이자(沈偉家)박사는 "90년대 후반부터 소매유통시장이 급팽창하면서 상하이는 현재 완전한 시장경제에 다가섰다"고 말했다. 그는 78년엔 정부가 가격을 통제한 품목이 97%였지만 지금은 95%이상이 시장에서 가격이 정해진다고 설명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상하이 유통시장은 완전히 자본주의 옷으로 갈아입은 듯하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사정은 딴판이다.

상하이 난징루의 맥도널드 매장. 손님이 햄버거를 다 먹자 직원들이 곧바로 달려와 쟁반을 치워준다. 셀프서비스를 창안해 패스트푸드 시장을 석권한 맥도널드의 전세계 매장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인력이 남아도는 중국정부가 매장 면적당 일정 수의 중국인 직원을 고용하도록 의무화했기 때문이다. 상하이에서 햄버거를 팔기 위해 맥도널드는 간판 마케팅 전략을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자유경쟁도 말처럼 자유롭지는 않다. 이마트는 도매업자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도매업자 대부분이 국영기업이거나 서로 동업관계여서 가격 담합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마트의 金지점장은 "할인점의 무기는 도매업자끼리 경쟁을 붙여 싸게 사들이는 것인데 여기선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업계 정보도 통제되거나 구할 수 없다. 40여개의 대형할인점 중 흑자를 내는 할인점이 몇개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1~2개 정도만 흑자를 내고 있을 것이란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현지 외국기업들 사이에선 "중국정부가 선진 유통기법을 배우는 수업료를 상하이의 외국 기업들에 대신 물리고 있다"는 볼멘 소리가 높다.

*** 탕지안후아 동방상사 사장 인터뷰

상하이 최고급 백화점 중 하나인 둥팡상샤(東方商廈)의 탕젠화(湯建華.44.사진)사장은 '눈높이 전략'을 강조했다.

"부유층은 디자인, 전문직은 저렴한 유명 브랜드를 찾는 등 계층.직업별로 소비자의 욕구가 다양해졌다. 상하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제각각인 소비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상품을 차별화하되, 남보다 빨라야 한다."

그는 연소득 8만위안(약 1천3백만원)이상의 전문직업인으로 공략대상을 정하고, 이들의 욕구에 맞는 상품을 집중 배치했다. 그 결과 동방상샤는 지난해 상하이 1백여개 백화점 중 매출 5위로 올라섰다.

이정재(경제연구소).남윤호(도쿄 특파원).양선희(산업부).정경민(경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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