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고은 '예감(豫感)'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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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가을이다.어느 나라의 인구가 줄어든다.

긴 편지를 쓰고 끝에는 '끝'이라고 썼다.

어제 솎은 60일 캐비지 한 접시

남은 경사(傾斜)의 술은 다 마셨다.들쥐들이 종점에서 종점으로 몰려 다닌다.

(중략)

가을이다.저 소학교 운동장에서

일생(一生)의 호각소리가 그친다.

모든 무덤들은 말한다.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고….

머무는 친우(親友)여, 나는 혼자서 뻗은 길을 걷고 싶구나.

-고은(1933~) '예감(豫感)'중

지난 세기, 1967년 12월 10일 서울 청진동 244 청진빌딩 32호실 인문서점(人文書店.발행인 박맹호)이 펴낸 세로쓰기 시집 『신(神). 언어(言語) 최후(最後)의 마을』의 첫 페이지에는 다 빈치의 '세례 요한'처럼 손가락을 쳐들어 허공을 가리키는 젊은 시인의 사진, 그리고 "삼가 2대 은사 고(故) 효봉(曉峰)스님과 서정주(徐廷柱)스승께 바치나이다"라는 헌사.

"그의 가면의 습기 때문에 그를 잊어버릴 수 없다"고 발문을 쓴 김현은 고인이 되었고 소학교는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이런 상고시대에도 가을은 오고 있었다. 아직도 가을은 끝나지 않았다.

김화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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