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시크릿 러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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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찰랑찰랑 잔 물결로 시작해 절벽을 후려치는 큰 파도가 되는 밀물처럼, 점증법으로 관객의 감정을 몰아가는 스위스 영화다.

이 가을에 사랑이 쓸쓸하거나 삶이 누추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한번쯤 볼 만한 소품. 남녀 주인공 모두 청각장애자라는 점이 특이하나, 괜히 장애인들 앞에서 작아지는 '학습된 감동'과는 다른 종류의 정서에 호소하는 영화다.

가난한 농촌 집안 출신인 안토니아(에마뉘엘 라보리)는 수녀원의 도움으로 교육을 마치고 20세가 되던 해 자신도 수녀가 된다. 부랑아 수용소에 배치돼 요리.빨래 등 잡일을 도우면서 생활하던 그녀는 어느 날 한 남자의 강렬한 눈빛과 마주한다.

역시 청각장애인인 마카스(라스 오테슈테트)라 불리는 이 청년은 리투아니아의 궁핍을 피해 스위스에 불법 체류 중이다. 달리 생계 수단이 없어 이복 형과 함께 소매치기로 빵을 해결해가고 있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점점 그에게 끌리는 안토니아와 그녀로 향하는 열정을 누르지 못하는 미카스. 안토니아는 결국 수녀로서의 계율을 어기고 그와 '내밀한 사랑'을 나누고 '죽음 이후의 천국보다 삶에서의 천국이 더 소중하다'는 미카스의 말에 공감해 수녀원을 뛰쳐나온다. 그러나 '삶에서의 천국'은 그렇게 호락호락 손에 쥐어지는 게 아니었다.

'시크릿 러브'는 헬렌 켈러처럼 장애인의 홀로서기에 관한 이야기이자, 한 여성의 자아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고, 수녀원이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은 인간이 벌거벗은 현실과 벌이는 투쟁이자, 침묵의 세계를 살아가는 남녀의 절절한 사랑이야기이기도 한, 다층적인 작품이다.

남녀 주인공 역을 한 배우들은 실제 청각장애인으로 특히 에마뉘엘은 '비욘드 사일런스'를 본 이들에게는 낯익다. 감독은 스위스 출신의 크리스토프 쇼프.

18세 이상 관람가. 10일 개봉.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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