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두기 역사학을 계승한다는 것은 ‘따라하기’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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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과 격변의 시절에, 좋은 스승과 똑똑한 제자들과 함께 서울대학에서 역사학 연구에 뜻을 두어, ‘특별한 감사와 남다른 자부와 무한한 경외’를 느낀다는 제자들의 인사치레 말에도 감격했던, 여린 성품의 범부(閔斗基, 1932.11.2-2000.5.7)가 평생 그렇게 그리워했던 하나님과 먼저간 딸 시원에게 가기위해 이곳에 무쳤다.”
한국 ‘동양사학계의 태두’ 故 민두기 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가 직접 친필로 남긴 ‘골호자명(骨壺自銘)’의 문구다. 지난 7일 오후 민두기 교수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는 목포대에서 민 교수의 10주기를 기념하는 ‘2010년 민두기 기념문고 학술세미나’가 그를 기리는 제자들과 국내 동양사학자들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1부 ‘기억과 계승’, 2부 ‘동아시아의 공화제’로 나누어 열린 이날 학술세미나에서는 고 민두기 교수의 학술적 업적과 계승에 관한 문제와 고인이 중국의 신해혁명을 바라보던 관점인 공화혁명론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졌다.

이날 조영록 전 동국대학교 명예교수는 ‘민두기 선생과의 만남을 회고하며’라는 발표에서 논증을 중시하는 개량적 자유주의적 방법를 펼친 호적 연구분야에서 거둔 민두기 교수의 업적을 강조했다. 조 교수는 “‘민두기의 호적연구’는 ‘민두기 자신을 탐색하는 작업’이 아니었을까하고 감히 생각해보게 된다”며 “선생의 연구 자세나 방법 등이 그(호적)와 매우 비슷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개석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민두기 선생의 학문을 어떻게 이을 것인가’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민 교수가 ▶1960,70년대 신문 잡지에 칼럼 기고를 통해 비판적 지식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한 점, ▶『동양사연구입문』을 커리큘럼에 넣음으로써 한국 동양사학이 독립된 학문적 방법론과 전문성을 갖춘 사회과학으로 설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 ▶1949년 이전의 역사를 현대사로 연구하였지만 역사수필의 형식을 빌어 20세기 후반 중국의 역사 또한 늘 관심선상에 두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이 교수는 이어 “민두기 선생의 역사학을 계승한다는 것은 ‘따라하기’가 아니다”라며 “우리의 중국사 연구도 오늘의 여건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경한 신라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민두기선생의 신해혁명사 연구와 ‘공화혁명론’라는 발표에서 신해혁명 100주년을 한 해 앞두고 민선생의 ‘공화혁명론’을 재조명했다. 민선생의 ‘공화혁명론’을 간단히 설명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한 1949년이 당대사의 기점이라면 현대사의 시점이 중국공산당의 창당을 가져온 1919년 오사운동이 아니라 중화민국의 성립을 가져온 1911년 신해혁명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중국의 공식 역사 구분론에 대한 반박논리다. 배 교수는 “민선생이 1949년 이후를 당대사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신해혁명에서 1949년까지를 현대사로 이해한다고 할 경우 최근 많은 논의가 전개되고 있는 1949년 전후의 연속성의 문제나 현대사와 당대사의 관련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후학들이 풀어야 할 과제라고 결론지었다.

“(시대적) 공동인식(共同認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역사연구자는 아웃사이더의 입장에서 장기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그래서, 혹자는 “역사가는 고독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독한 역사가가 많이 존재하는 사회가 진정 깨어있는 사회다. 나(민두기)는 역사에서의 진보를 믿는다. 하지만, 그 역사의 진보는 보다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한 연구 위에서 가능한 것이며, 사실(史實)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전제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생전에 고독했던 역사가 민두기 교수는 그 해 첫눈이 내리던 1997년12월8일 자신이 30여년 넘게 ‘설경(舌耕)’을 일궜던 서울대를 떠나며 가진 고별강연을 이렇게 끝맺었다. 한국 지성사의 한 장을 장식한 것으로 평가받는 걸출한 학자 민두기 교수의 10주기를 맞아 그가 이룬 업적과 후학들에게 남기고 간 과제들을 되새기는 사이에 어느덧 석양이 목포항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민두기(1932~2000)=전남 해남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淸代 紳土層의 硏究』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와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및 연세대 석좌교수를 역임했고, 대만 중앙연구원, 중국 난징대, 일본 도쿄대, 독일 함부르크대,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및 스탠포드대 후버연구소 등에서 중국근대사를 연구했다. 저서로는 『中國近代史硏究』, 『中國近代改革運動의 硏究』, National Polity and Local Power: The Transformation of Late Imperial China, 『辛亥革命史』 등이 있다. 엄격한 학술적 태도와 교육 방침으로 한국 동양사학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수준으로 향상시켜 ‘동양사학계 태두’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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