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자 행세 군 면제 … 진짜 정신 이상한 비보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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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지난해 초 국내 최초의 비보이그룹 T.I.P 멤버였던 이모(25)씨는 징집영장을 받았다. 국내 최대 규모의 비보이 경연대회를 3개월여 앞둔 시점이었다. 그해 9월엔 일본에서 열리는 세계대회에도 참가할 예정이었다. 입대하면 수년간의 연습은 물거품이 된다. 고민하던 이씨는 술자리에서 팀 선배들에게 속내를 털어놨다. 이 자리에서 한 선배가 솔깃한 이야기를 했다. 정신분열증 환자 행세를 하면 군 면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선배는 “나도 그렇게 해서 군대에 안 갔다”며 “팀 안에 그런 사람이 여러 명”이라고 했다.

이씨는 곧바로 서울의 한 정신병원을 찾았다. 의사를 속이기 위해 어머니와 동행했다. 어머니는 의사에게 “애가 자꾸 환청이 들린다고 한다. ‘젊은 여자가 보인다’며 방 안에서 나오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이씨는 의사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이상한 행동을 했다. 이씨는 결국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다. 한 달간 입원 치료도 했다. 징병신체검사 규정에 따르면 6개월~1년 이상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았거나 1개월 이상 입원한 경력이 있어야 5급 판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두 달 후 이씨는 군 면제 대상인 5급 판정을 받았다. 그사이 이씨는 국내 대회에 팀원으로 참가해 우승했다. 이후 일본에서 열린 세계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이씨의 동료 2명도 같은 수법으로 각각 5급(면제)과 4급(공익근무) 판정을 받았다. 이들도 정신분열증 환자 행세를 해 진단서를 발급받는 수법을 썼다. 이씨 등에게 방법을 자세하게 일러준 리더 황모(30)씨 등 6명 역시 같은 방법으로 모두 군에 가지 않았다. 황씨는 현재 서울의 한 예술학교에서 무용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하지만 이들의 행각은 결국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비보이들 사이에 정신병 환자 행세를 해 군에 가지 않는 수법이 유행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이 수사에 나서면서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3일 이씨 등 3명을 병역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나머지 6명은 공소시효가 지나 입건하지는 않았지만 이들도 모두 군에 입대해야 한다.

경찰이 수사결과를 발표한 3일 기자와 만난 이씨는 “세계대회에 나가면 태극기를 어깨에 두르고 자랑스러워 했었는데…”라며 “하지만 지금은 부끄럽기만 하다”고 말했다. 그는 “격렬한 춤을 춰야 하는 비보이들은 운동선수와 다를 바 없다”며 “20대 초반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때라 군대에 가는 걸 두려워한다”고 했다. 군 복무기간(2년) 동안 활동을 중단하면 감각을 잃어버려 무대로 돌아오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씨는 정신병 환자 행세를 한 이유에 대해 “어깨 탈골처럼 신체를 훼손하는 방법은 평생 춤을 추고 싶어 하는 비보이들에겐 치명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경찰 관계자는 “정신질환 등을 이유로 군 면제를 받은 다른 비보이 멤버들이 있는 지에 대해서도 수사를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정선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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