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재벌 때리기가 경제 살리기보다 급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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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한나라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열린우리당 단독으로 전격 처리됐다. 반대하던 재계는 충격에 빠졌고 경제단체들은 반발하고 있다. 개정안 내용은 출자총액 제한, 재벌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 계좌추적권 등 하나같이 대기업의 손발을 묶는 것이다. 특히 이번 법개정으로 국내 간판기업들은 외국 투기세력의 경영권 위협에 무방비로 나앉게 됐다.

무엇보다 재계와 야당이 모두 반대하는 개정안을 화급하게 밀어붙이는 이유를 정부.여당에 묻고 싶다. 우리의 최대 현안은 투자.소비 회복을 통한 경제난 탈출이다. 하지만 이번 조치로 인해 대기업들은 투자보다 경영권 방어에 더욱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경제 살리기와는 정반대로 나아가고 있다. 경제보다 재벌 옥죄기가 더 급한 과제란 뜻인가.

정부는 대기업이 투자는 하지 않고 경영권 방어에만 급급해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언제 경영권을 뺏길지 모를 상황에서 어떤 기업인이 경영에만 전념할 수 있겠는가. 현재 대기업들은 외국의 경영권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10대 기업의 외국인 투자비중이 평균 44%나 되고, 60%를 넘는 곳도 있다. 최근 우량기업에 대한 적대적 M&A 시도가 늘면서 대책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판에 정부.여당은 그나마 남은 국내기업의 경영권 방어수단마저 박탈한 것이다. 외국자본을 차별해선 안 되지만, 반대로 외국 투기자본은 활개치게 내버려 두면서 국내 대기업의 손발을 묶는 역차별 또한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런 움직임의 이면에는, 대기업에 대한 현 집권세력의 적대감과 편견이 작용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대기업이, 사주(社主)가 못마땅하다고 알짜 기업을 통째 외국자본에 넘겨준다면 이는 국부와 국력의 심각한 손실이다. 왜 우선순위를 가릴 줄 모르는가. 우리 경제는 3분기 성장률이 4.6%로 떨어지는 등 최악의 상태다. 정말 남미 짝 나지 않으려면 대기업을 적대시하고 손발 묶는 일은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