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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아버지가 자녀에게…

중앙일보

입력


지식만 집어 넣어 머리만 커진 요즘 아이들에게 마음을 키우는 지혜를 선물하는 아빠들을 만났다. 이들은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며 휴일이면 아이들의 손을 잡고 호연지기를 키우러 여행을 떠난다. 아이들과의 속살 깊은 대화는 여정에서 얻는 덤이다.

자전거 여행하며 겸손·도전 일깨워

김선웅(48·경기도 의정부시 민락동)씨는 주말마다 두 딸 하영(16)·하은(12)양과 함께 자전거 트레킹을 떠난다. 부용천, 중랑천 등 한강 물줄기를 따라 달리며 평소 잊었던 심장의 뜀박질을 느껴본다. 그 때마다 김씨는 “건강하면 천하도 얻을 수 있다”는 좌우명을 되새긴다.

김씨의 자전거 사랑은 대장암 수술을 한 뒤부터 시작됐다. 2년 전 맏딸의 건강 검진 권유로 병원을 찾았다가 대장암을 발견했던 것이다. 6개월 동안 항암치료가 이어지면서 김씨는 성공에 대한 욕심으로 삶의 가치와 가족애를 잃어가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항암치료는 마음도 치유했다. 그는 “정직하게 일하고 믿음으로 살자”고 결심했다. 등을 돌린 동업자 때문에 사업에 실패하면서 얻은 교훈이기도 하다. 딸에게 “시간이 걸리고 돌아가도 바른 길을 가자”며 인생경험을 전했다.“인간관계에선 욕심을 취하지 말고 먼저 양보하고 손 내밀라”고 당부했다. 딸들은 김씨의 조언을 가슴에 새겼다. 하영양은 “예전엔 잔소리로 흘렸을 말”이라며 “함께 자전거를 타면서 아빠와의 벽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딸들의 성격도 적극적이 됐다. 하은양은 여린 성격을 버리고 지난해 전교회장 선거에 도전하기도 했다. 하은양은 ”비록 낙선했지만, 자전거 여행으로 활달한 마음을 키워주고 매일 밤 잠들기 전 축복 기도를 해주는 아빠의 사랑이 힘이 됐다”고 말했다.

캠핑하며 관찰력과 책임감 선물

남세현(48·경기도 용인시)씨는 초등생인 두아들 정수(12)·성수(10)군과 4년째 캠핑을 다닌다. 겨울을 빼곤 매달 산과 바다를 누비며 야영을 한다. 여름에는 고기를 잡고, 봄·가을엔 자전거로 들판을 누빈다. 남씨는 “쉬고 싶은 주말엔 때론 귀찮기도 하지만 자연을 벗삼아 뛰노는 아이들을 떠올리면 어느새 여행 가방을 꾸리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학벌보다 바른인성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감을 갖고 어려움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느꼈다. 두 아들에게 세상사를 공부시킬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캠핑을 골랐다. “집에선 몰랐던 불편을 느끼고, 역할을 분담해 서로 돕고 책임을 다해 어려움을 이겨내는 경험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처음엔 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반대했던 아내도 지금은 후원자가 됐다. 아이들의 변화를 체감하면서다. 정수군은 곤충학자의 꿈을 키우고 있고, 성수군은 곤충의 이름과 생김새를 모두 외우고 다닐 정도다. 물수제비 던지기, 풀피리 만들기 등을 하며 제법 자연과 더불어 놀 줄도 알게 됐다. TV와 컴퓨터 대신 자연과 어울리면서 활동성과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김씨는 “캠핑 덕에 아이들의 관찰력과 호기심이 왕성해졌다. 질문이 많아져 귀찮을 정도”라며 흐뭇해했다. 그는 또 “텐트를 치고 모닥불을 피우고 고기를 잡는 아빠를 보는 아이들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온다”며 “엄마에게 뺏긴 아빠의 자리를 되찾은 기분”이라고 덧붙였다.

함께 걷는 길, 동감 이루고 생각 키워

김수성(48·경기도 일산시 주엽동)씨는 2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다. 두피가 벗겨지고 다리 절단을 논의해야 할 정도였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우여곡절 끝에 정상으로 회복됐지만 마음이 아팠다. 교통사고 전 잦은 술자리와 늦은 귀가를 일삼던 자신 때문에 힘들어 하던 가족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김씨는 아들·딸과 등산을 시작했다. 가족여행을 갈 땐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여정을 짰다. 계획에 대해 두런두런 얘기하다보면 학교생활·교우관계·취미·공부에 대한 대화가 자연스레 이어졌다. 멀리 가지 못할 땐 집 근처 산에라도 올랐다. 두 시간 남짓한 등산길을 걸으며 땀을 흘리면 아버지와 아이들은 어느새 친구가 됐다. 벗이 된 서로에게 못할 말이 없었다. 아이들은 가슴 속 고민을 꺼내고 김씨는 자신의 청소년기를 들려줬다. 아들 앞에선 늘 슈퍼맨인척 했던 김씨도 이 시간엔 허점 투성이 인간으로 아들·딸과 마주했다. 김씨는 ‘시간을 많이 허비해 아쉬움만 남는다’며 실패 경험을 아들에게 고백하기도 했다. 김씨는 독거노인을 돕는 아들의 학교자원봉사에도 동참했다. 독거노인들의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는 대화법, 정서교류 방법, 얼굴 표정 등을 가르쳐주며 아들과 함께 했다.

무뚝뚝했던 아들은 이런 아버지의 변화를 보며 마음을 열었다. 예전엔 어른들의 훈계 정도로만 생각했던 아버지의 말을 곱씹기 시작했다. 게임에 매달리던 시간이 줄고, 가족과 대화하는 시간이 늘었다.

아들 기정(16)군은 “그 동안 마음속에서만 혼자 키워왔던 영화배우가 되려는 꿈에 대해서도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며 대학 전공과 영화분야 직업에 대해 함께 조사해주는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김씨는 “아들·딸과 등산길에 오르면 친구가 되고 인생을 함께 걷는 동반자로 마음이 통하게 된다”고 말했다.

[사진설명]김선웅씨가 아내와 두 딸 하은·하영(사진 왼쪽부터)양과 함께 자전거 트레킹을 하며 활짝 웃고 있다. 아버지와 딸들은 매주 자전거를 함께 타며 부녀간의 벽을 허물고 있다.

< 박정식·송보명 기자 tangopark@joongang.co.kr / 사진=최명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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