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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루스어, 100년 전 상하이 엑스포 예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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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호 33면

1904년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세계박람회를 위해 서태후(西太后)는 황족 가운데 가장 민주적이던 푸룬(溥倫·앞줄 가운데 안경 쓴 사람)을 대표로 파견했다. 중국관 앞에서 서양 사람들과 함께서 있는 중국 대표단의 모습. 김명호 제공

중국은 세계박람회(엑스포)와 인연이 많았다. 1851년 5월 1일 런던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의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당시 템스 강변에는 영국 상인들이 홍콩에서 만든 중국 범선 치잉(耆英)호가 정박해 있었다. 구경꾼들이 줄을 이었다. 빅토리아 여왕도 치잉호를 찾았다. 배 안에는 영국인들에게 고용된 30명의 중국인 선원이 있었다. 이날 여왕은 변발을 늘어뜨린 시성(希生)이라는 선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시성을 박람회 개막식에 초청했다. 영국은 황급히 중국관을 마련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63>

외국인들 틈에 끼어 개막식을 참관하던 시성은 감격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귀빈들 틈을 순식간에 뚫고 나와 여왕에게 경극 배우들처럼 멋진 인사를 선사했다. 사람들은 대청제국이 파견한 외교사절인 줄 알았다.상하이에 쉬룽춘(徐榮村)이라는 동작 빠른 비단 장수가 있었다. 런던에 큰 시장이 선다는 소식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창고에 있던 비단 열두 필에 ‘영기호사(榮記湖絲)’라는 상표를 붙여 런던으로 보냈다. 엄선을 거듭한 최고의 품질이었지만 포장이 엉성해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했다. 최고의 오피니언 리더는 부인네들이었다. 이들의 입을 통해 원산지에서 온 비단이라는 소문이 금세 퍼졌다. ‘영기호사’는 금상을 받았다. 여왕이 직접 상패와 상장을 수여했다.

물건만 보내고 참석을 하지 않았던 쉬는 상장과 상패를 만져 보기는커녕 구경도 하지 못했다. 이후 박람회마다 청(淸)나라는 초청을 받았지만 관심이 없었다. 중국에 와 있던 외국인으로 대표단을 구성해 참가시켰다.

1876년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청나라 정부는 닝보(寧波)세관원 리구이(李圭)를 파견했다. 리는 은 20만 냥에 해당하는 공예품·차·비단·도자기 등을 720개 상자에 싣고 상하이를 떠났다.

리구이는 세계박람회에 참석한 최초의 중국인답게 기록을 남겼다. “전 세계가 중국 상품을 필요로 한다. 듣자 하니 1∼2년 후 파리에서 또 박람회가 열린다고 한다. 계속 열릴 모양이다. 중국이 세계무역에서 일석이라도 차지하려면 상업계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참석시키는 것이 좋겠다. 나 같은 사람이 올 곳이 아니다. 전통적인 수공예품이나 특산품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공상업을 발달시켜야 국제사회에서 대접받는다.”

청나라 정부가 미국으로 보냈던 제1차 관비 소년 유학생들이 단체로 중국관을 찾았다. 리구이는 이들과도 대화를 나눴다. “집 생각 나지?” “생각한들 소용이 있나요, 공부나 열심히 해 국가에 보답해야죠.” 리는 자신의 소감을 적었다. “소년들은 점점 미국화되고 있다. 변발을 감추기 위해 큰 모자들을 쓰고 날아오는 공을 방망이로 두들겨 패고는 있는 힘을 다해 달린다. 심지어 예배를 보러 몰래 교회에도 다닌다.” 리는 귀국 후 자신의 일기를 토대로 '환유지구신록(環游地球新錄)'을 저술해 지금의 총리 격인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에게 제출했다. 하룻밤을 꼬박 새운 리훙장은 직접 서문을 썼다. 1876년을 기점으로 서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년 후 열린 파리 박람회에 청나라는 주영국 공사 궈충다오(郭崇燾)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해 파견했다. 리훙장도 측근 마젠중(馬建忠)을 정치와 경제를 배워 오라며 딸려 보냈다. 궈충다오는 서구의 기술과 정치·교육제도를 칭찬하는 일기를 남겼다. 마젠중은 리훙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균세(均勢:세력이 균형을 이룬 형세)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우리가 천조대국(天朝大國)이라는 생각을 버리실 것을 권합니다. 여러 나라들과 공생해야 합니다.” 출품한 물건들은 그게 그거였다.

궈충다오는 귀국 후 곤욕을 치렀다. “서양 귀신에게 홀린 놈”이라며 놀림감이 됐다. 고향 사람들은 그가 태어난 집을 흉가라며 때려 부수려 했다. 마젠중은 가는 곳마다 매국노라며 손가락질을 당했다. 날아온 돌멩이에 직통으로 맞아 뒤통수가 깨지기도 했다. 보수 세력들은 미국에 파견했던 관비 유학생들을 가차 없이 귀국시켜 버렸다.

이 와중에서도 백일몽을 꾸는 사람들이 있었다. 1908년 톈진에서 발행하던 한 잡지에 “중국은 언제나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을까!”라는 글이 실렸다. 1910년 소설가 루스어(陸士<8AE4>)는 잡지 ‘신중국’에 상하이 푸둥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릴 것을 예언했다. 워낙 말 같지 않은 소리들이다 보니 비난하는 사람도 없었다. 대신 정신병자 취급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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