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이세돌-구리, 벼랑에서 맞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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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 삼성화재배 세계오픈이 열리는 대국장 옆 검토실에서 조훈현 9단(사진 맨오른쪽)·김성룡 8단(오른쪽에서 세번째)·목진석 8단(오른쪽에서 네번째) 등과 중국 프로기사들이 이세돌-구리 대국을 검토하고 있다.

이세돌9단과 중국의 구리(古力)7단이 1대1로 팽팽히 맞서며 승부는 19일의 최종전으로 넘어갔다. 이세돌은 16일의 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준결승 첫판에서 중국의 구리7단을 꺾고 우승컵을 향해 한발 다가선 듯 보였으나 18일의 2국에서 패배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한편 저우허양(周鶴洋)9단과 왕시(王檄)5단의 준결승전은 왕시가 2대0으로 승리, 결승에 선착했다(첫째판 흑 3집반승, 둘째판 백 불계승).

대전시 유성에서 열린 이세돌대 구리의 준결승전은 마치 결승전과 같았다. 다른 한판에서 맞붙은 중국의 저우허양9단과 왕시5단이 결코 한 수 아래는 아니지만 이세돌과 구리에겐 명성에서 미달하는 까닭이다.

첫날 이세돌은 치열한 난타전 속에서 구리가 범한 치명적 실수를 응징해 완승을 했다. 그러나 둘째판에선 초반의 급공이 실패하면서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돌을 던져야 했다. 세계 기전의 주요 승부에서 오전에 대국이 끝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국에 신4인방(이세돌.최철한.박영훈.송태곤)이 있다면 중국엔 삼총사(구리.쿵제.후야오위)가 있다. 최강 이창호9단을 예외로 칠 때 실전에서 자주 부딪히는 양측의 주력은 바로 이들이다. 이번 대회에서 이세돌은 후야오위(胡耀宇)7단을 누르고 4강에 올랐다(후야오위는 이창호를 탈락시켰다).

그러나 최철한은 구리에게 졌고 박영훈은 저우허양에게, 송태곤은 쿵제(孔杰)를 꺾은 뒤 복병 왕시에게 무너졌다.

신4인방과 삼총사의 대결은 결국 이세돌과 구리의 일전에서 판가름나게 됐다. 한.중 대결로 치닫는 세계 바둑계의 판도에서 이번 승부가 주는 의미는 그래서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첫판을 이긴 뒤 이세돌은 "출발은 내가 나빴지만 구리가 착각해 승리했다. 승부란 나중에 실수하는 사람이 불운하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하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구리는 오랫동안 우승을 못해본 중국을 위해 필사적으로 두겠다고 다짐하더니 2국을 이겼다. 만약 19일의 3국에서 구리가 승리한다면 중국은 우승을 확정짓게 된다. 1995년 마샤오춘(馬曉春)이 후지쓰배에서 우승한 이래 무려 9년 만이다.

한편 올해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며 결승까지 진출한 왕시는 뛰어난 균형감을 지녔고 현재 중국에서 승률 1위를 달리고 있는 신예기사로 이번 대회에서 최대의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박치문 전문기자

<준결승 대국 이모저모>

○…이세돌9단은 만약 결승에 올라간다면 결승전 상대로 누가 마음에 드느냐고 묻자 평소 거침없는 성격 그대로 "당연히 저우허양이다. 왕시는 신예기사지만 실력이 더 강한 것 같다"고 대답. 대국장인 삼성화재 유성연수원은 사방이 숲이고 주변은 적막하다. 이세돌9단은 응원차 내려온 박영훈.송태곤 등 젊은 기사들과 주로 탁구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구리.왕시.저우허양은 모두 중국리그에서 5연패를 달성한 충칭(重慶)팀 소속이다. 이 바람에 충칭 바둑팬들은 "중국이 못한 우승을 충칭이 해낸다"며 한껏 고무된 분위기라고. 중국은 충칭의 신문기자들 외에 국영 CC-TV와 체단주보 등에서 6명의 기자가 동행,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다.

○…조훈현9단이 KBS-TV의 해설자로 현지에 나타나자 연수원에 온 교육생들이 당연히 선수로 알고 "우승하세요"라고 성원. 이 대회에서 두 번이나 우승했던 조9단은 그 말에 씁쓸히 웃으면서도 타고난 순발력을 발휘해 "내년에 하겠다"고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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